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책/논문의 목차와 참고 자료를 보면, 그 자료의 수준이 얼추 판가름 난다고 한다. 실제로 양질의 글은 그에 준하는 혹은 그 이상의 참고 자료에 빚지고 있다. 

박사 학위 논문은 참고 자료 싸움이다. 내 경우 지도 교수가 가끔 관련 자료와 학자들을 일러주는데, 그 이유는 그(의) 자료를 숙지하고 있으라는 의미이다. 나는 그 자료를 검토하고 내 논문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답장으로 알려준다.

학업을 위한 글을 쓸 때마다 수많은 자료를 검토하지만, 내 글에 영향력 있는 자료들은 대체로 대가의 것이거나 생소한 자료에 근거할 때가 잦다.

어제 작성한 "사사기 21장 19절과 사무엘상 1장에 나타난 초막절"이라는 글에서 인용한 두 학자 중 Walter Zimmerli는 전자에 해당하고, Susan Ackerman은 후자에 해당한다. 오늘 Ackerman의 저작을 읽고 있는데, 두 본문에 대해 누구보다 상세하게 다루었다. 나로서는 초막절에 관한 더 상세한 자료를 보강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여성의 제의 참여'라는 새로운 주제를 고려해야 한다.

공부할수록 탐구 영역이 예상을 벗어나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내 글의 깊이는 더 깊어지고 논쟁의 범위는 더 넓어진다. 제한된 시간에 내 연구 주제 범위 내에서 능수능란하게 다뤄야 하는 책임은 오로지 내 몫이다.

,

고등교육에서 박사 학위는 최종 단계에 해당하며, 그 위치에 준하여 학술적 역량에서 최상급을 요구한다. 박사 학위 소지자는 이상적으로는 전공 분야, 현실적으로는 학위논문만큼은 제출일을 기점으로 세계 최초이자 세계 최고의 담론을 담고 있어야 한다.

인문학에 해당하는 신학은 최종적으로 논문을 통해 학생 개인의 학술적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 학위 논문에 포함되는 요소는 다양하지만, 기본적으로 글로 심사자들을 설득해야 하고, 최종 단계에서 구술 면접으로 방어전을 치러야 한다.

주로 글로 지도 교수(진)를 비롯한 심사자들과 대화한다는 측면에서, 나처럼 회화 능력이 다소 부족해도 학업을 진행하는 데 큰 문제는 없지만, 그만큼 단일 요소로 학습자의 역량을 다 보여줘야 한다.

영국 대학 박사 과정이 연구자 배출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지도 교수(진)가 학생에게 세세한 지침을 주지 않는다는 교육 방식을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수긍하다 해도 교정이라는 또 다른 장벽에 마주치게 된다. 비영어권 국가 유학생에게는 영어라는 언어적 장벽이 더해짐.

비원어민 학생들이 교정을 위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서비스는 Grammarly가 있다. 최근에는 ChatGPT가 유용하다고 한다. 사용자의 역량에 따라 다르겠으나, 이런 서비스를 활용해도 지도교수(진)로부터 교정을 반복적으로 요구받을 수 있다. 개인의 편차에 따라 달라지겠으나, 논문 최종 제출 전에는 최소 1회 이상 전문 편집자로부터 교정을 받는다고 들었다.

기본적으로 교정은 문법과 어휘, 가독성 등을 다룬다. 영작 경험이 적은 이들은 대다수 이 단계에서 도움을 많이 받는다. 문법 오류나 각주 양식 등 기본적인 사항은 엄수해야 하겠으나, 지도 교수(진)가 교정을 요구하는 이유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달 문헌조사와 연례 평가를 위해 지도 교수를 만났을 때, 그가 내게 교정을 요구하면서 "자신이 집중해서 읽고 더 나은 피드백을 주기 위해서"라고 직접 이유를 밝혔다. 나는 그의 말에 교정이 갖는 두 번째 의미가 있다고 본다. 지도 교수는 학생의 글에 담긴 주장과 근거 등을 가장 먼저 판단해 주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줄 책임을 갖고 있다. 그래서 학생은 지도 교수가 일차적인 교정 작업을 건너뛰고 바로 내 글을 평가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비싼 학자금을 내는 학생의 입장에서 교수가 그 정도는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없지 않지만, 그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다음은 박사 학위 논문은 최종적으로 출판을 목표로 하므로 논문 자체가 출판할 수 있는 상태로 제출되어야 한다. 논문 집필 단계에서 교정을 병행하면 글의 수준이 올라가기 때문에, 최종 교정을 할 때 수정 작업이 수월해질 수 있다.

또한 교정 단계에서 작업자가 글의 질적 향상을 위한 일차 독자의 기능을 할 수 있다. 교정자의 역량과 정성에 따라 다르겠지만, 가독성과 흐름 등에 도움을 주기도 하므로, 그로부터 적잖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왜 학자금 이외에 별도의 자금을 들여 교정받아야 하지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지만, 학생이 아니더라도 논문 게재를 위해 사설 업체에 교정을 맡기는 사례가 적잖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역시 현실에 순응하고 더 나은 방향을 잡아야 하는 쪽이 낫지 않나 싶기도 하다. 문제는 돈이다.

,

박사 과정을 시작한 이후 수업을 들은 적이 한 번도 없다. 지도 교수가 자기 제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세미나는 주로 토론과 원전 강독으로 진행되므로, 전형적인 지식 전달과는 다른 교수법이다. 신학부 내 구약 분과와 신약 분과에서 매 학기 진행하는 세미나에서 그나마 강연자로부터 배울 기회가 있다. 오랫동안 관성적으로 익혀온 "공부한다", "배운다"는 개념이 완전히 달라지는 단계가 바로 박사 과정이다.

공부란 내가 선행 연구를 익히고 새로운 기여점을 찾아 글로 쓰는 것이고, 지도 교수는 내 연구가 성공적인 결과를 맺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역할을 맡는다. 지금껏 내 지도 교수가 한 일은 Probationary Review와 Annual Review 등 평가를 위한 의견과 일정 조율, 내 글에 대한 조언, 추후 계획에 대한 대화 등이 대부분이다. 나머지는 전부 내가 알아서 해야 한다.

지도 교수의 입장에서는 내가 선행연구를 잘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고, 내가 학계에 무엇을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알아야 비로소 본격적인 연구를 위한 준비가 되었다고 평가한다. 지도 교수가 간간이 내 연구와 관련된 학자들과 책을 소개해 주는데, 그 연구가 내 연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명쾌하게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 후 학교가 요구하는 시한 내에 자신의 논문을 단계별로 쌓아 올려야 한다. 스코틀랜드 소재 박사 과정은 full time 기준으로 3년 동안 학자금을 내고, 무상으로 1년을 연장할 수 있다. 연장에 대해서는 학교 규정을 참고하라. 학교 측에서는 평균 4년이 걸린다고 예상한다. 영국 학교의 장점이라면 학생의 역량에 따라 기간을 줄일 수 있다는 정도이다.

이제 본격적인 논문 작성 단계에 진입했고, 조만간 학교 규정으로 박사 과정 3년 차 학생이 된다. 박사 학위를 받기 전까지는 박사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반복적으로 생각하게 될 듯하다.

,

박사 학위가 소지자의 독자적인 연구 능력가 가능하다는 인증서라면, 학위 논문은 그의 실력을 평가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학위 취득 이후 새로운 연구 분야로 돌진하는 사례가 간혹 있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학위 논문을 발전시키고 확대하는 방향으로 연구자의 삶을 시작한다.

박사 과정 학생이 자신의 연구가 학계에 새로운 기여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고, 그 주장이 심사자들로부터 받아들여지려면, 과연 무엇이 새로운 기여인가를 밝힐 수 있어야 한다. 그 첫 작업이 바로 선행연구 분석이다. 선행연구의 문제점을 찾는 것이 연구의 시작점이고, 그 개선안을 제시하는 것이 연구의 종점이지만, 무엇보다 선행연구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박사 학위 논문에서 선행연구를 최대한 다루고 자신의 주장을 성공적으로 개진한다면, 학위 취득 이후에는 선행연구를 다루는 일이 덜 수고스러워진다. 새 연구에서 학위 논문을 인용하면 되니까 말이다.

새로운 연구를 한다면서 기존 연구들에 먼저 통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과정을 견뎌내야 학위 취득 이후가 편해진다. 내가 지금 힘들다는 말임.

,

많은 자료를 읽은 것과 인용할 자료를 많이 찾은 것으로 자신의 실력을 내세워서는 안된다. 연구자에게 이 과정은 자신의 연구를 위한 준비 작업에 불과하다. 운동선수에게는 스트레칭 정도일까?

수많은 참고 자료들을 압축하고 재진술한 결과야말로 선행연구를 이해하는 능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것마저도 연구자의 자질을 논하기 이르다. 연구자의 진짜 실력은 그것을 넘어 자신의 주장을 내지를 수 있을 때 비로소 검증이 시작된다.

,

Johannes Beutler의 요한복음 주석은 꽤나 유용한 자료이다. 나는 그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고 있지만, 간혹 의문스러운 문구를 남겨두기도 했다. 아래는 그 중 하나이다.

What are we to gain from the formula repeated five times that the good shepherds “give/lays down” his life for his sheep? Here, we are helped by a text out of the Synoptic passion narrative (Mark 14:27 par. Matt 26:31) that interprets the beginning of Jesus’s passion and the subsequent scattering of the disciples. There is also a Synoptic parallel for the motif of the gathering of the sheep of Israel in Matt 15:24; 10:6 where the connection with Ezek 34 is especially prominent.

(source) Beutler, A Commentary on the Gospel of John, 278.

요한복음 10장 선한 목자 담론에서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을 가르치신다. 17-18절에서 예수의 죽음 이후 남겨진 무리에 대한 말하지 않는다. 본문의 관심은 예수의 죽음 이후 부활이 예수의 선택이며, 그 선택은 아버지의 계명을 수렴한 것이라는 데 있다.

그러나 Beutler는 본문을 넘어서 공관복음 수난사화와 에스겔 34장을 연결해 은혜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내가 볼 때, 이같은 행위는 해석자의 의무를 넘어서는 것이다.

,

1. 고대 이스라엘의 흥망성사
고대 세계에서 '신'의 존재는 기정 사실이었다. 집단마다 신의 존재와 성격을 서로 달리 규정해도, 신(들)과 자국의 정체성과 운명을 동일시하는 신념은 동일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인간의 죄가 신과 간극을 만들며 일정 범위를 넘어서면 결국 단절을 만든다고 믿었다 (대표적으로 에스겔서). 반면 거룩은 신과 화목케 하고 그의 임재를 지속시킨다고 믿었다. 제사장 집단은 이스라엘 백성이 속죄제를 통해 정결한 상태를 유지하고, 속죄제나 기타 요소들로부터 오염되지 않도록 본인의 정결을 지속시킬 의무가 있었다. 

문서설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지만, 우리가 말하는 구약 성경의 형성에 제사장 집단의 영향력이 지대하다는 가정은 부인할 수 없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종교 지도자의 위치를 갖었던 제사장의 비중과 예언자들 중 제사장 출신들이 제법된다는 사실도 한 몫한다. 고대 이스라엘 역사 편집 과정에서 신명시 사관의 영향도 상당히 개입되었을 여지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죄의 오염 방식과 죄의 정화 방식 등 고대 이스라엘인의 세계관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지만, 그들의 열정이 이스라엘 국가의 안녕과 긴밀히 연관되었다고 단정지을 수 있다. 

2. 하나님 나라
대부분의 교회에서 헌법으로만 존재하는 '권징'을 제외하고, 실질적인 정화 의식은 '회개'와 '성만찬'으로 보인다. 성만찬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측면만 강조하는 교회에서는 정화라는 요소조차 배제된다. 그렇다면 현대 교회에서 회개가 유일무이한 정화 의식이라 할 수 있겠다.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성령을 허락하셨고, 성령의 동행은 신자의 거룩한 삶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다. 회개는 인간의 연약함을 돕는 수단으로 자리한다.

성도는 현실 세계가 하나님 나라라는 인식으로 살아 가야 한다. 그러나 대다수는 천국을 속세와 다른 공간의 세계로 그리며 이분법적인 사고로 살거나, 속세의 성공이 축복이라는 믿음으로 살아 간다. 더하여 담임목사들은 교인들이 교회에 더 헌신하기를 바라고 그들이 교회를 옮기지 않도록 회개와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 회개로 정죄하는 목사들도 상당함.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결론을 내면, 신자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확고히 해야 한다.

,

오랜 시간 동안 검증받는 인생을 살고 있다. 지금은 유학생 신분으로 박사 과정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내 자신을 검증하고 있다.

내 지도 교수는 자신이 논문 지도를 하는 박사 과정 학생들만 대상으로 세미나를 진행한다. 내가 2년 넘게 지도 교수의 프로필을 지켜보고 있는데, 그가 지도하는 학생의 수가 4명을 넘은 적이 없다. 현재 지도 교수, 나, 동료 학생, 이렇게 3명이 세미나에 참석하고 있으며, 매 번 3시간 동안 진행된다. 앞 두 시간은 책과 소논문으로 토론하고, 남은 한 시간은 히브리어와 헬라어 강독을 한다. 지도 교수는 세미나를 통해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하는 동시에 학생의 지식 습득 능력과 성경 원어 능력 등을 평가한다.

자신의 연구는 세미나와 별도로 진행해야 한다. 내 경우 세미나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내 연구를 병행할 여력이 나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현 세미나 주제가 내 연구 주제의 한 축이라 잠시 내 연구를 미뤄도 손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현 시간 기준 이틀 전 동료 학생의 말을 들어보니, 현재 Probationary Review를 진행 중이라 그런지, 히브리어와 헬라어 본문을 20분 동안 훓어보고 왔단다. 그래도 대단한게 그 친구는 그렇게 해도 잘 넘어간다. 반대로 나는 조금만 방심하면 바로 티가 난다. ㅡㅡ;
 
다른 교수들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학생들을 평가하는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내 지도 교수는 이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제자들을 훈련하고 평가한다. 내가 직접 경험해보기 전에는 영국 박사 과정이 여유로워보였는데, 실제로는 꼭 그런건 아닌 듯싶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지도 교수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St Andrews로 이사 온 후 학업에 관해 한인 유학생들과 대화를 자주 나누는데, 이미 미국 Calvin Seminary에서 비슷한 대화들을 나누었으나, 여기서도 내 경험이 일반적이지는 않아 보인다.

난 전체적으로 뛰어난 역량을 가진 육각형 인재가 아니다. 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면, 개별 능력치가 들쑥날쑥하고, 특정 한 두 영역이 높이 치솟은 형태이다. 그 능력치가 대학원 과정에서 고평가받는 상황이라 내가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특히 영국 박사 과정과 내 성향이 잘 들어맞는 듯하다.

내가 원어민처럼 농담이나 토론을 할 수 없어도, 성경 언어 분석에 특출나지 않아도, 페이퍼에서는 여지껏 주의할 만한 지적 상황이 전혀 없으니, 지도교수나 다른 평가자들이 내 학술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나로서는 내 부족함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지만, 주요 평가가 좋아서 매 번 감사와 의아함이 공존한다.

학생은 훈련과 검증을 받아야 한다. 좋은 성적은 기본이고 평가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야 한다. 이상적으로는 육각형 인재가 바람직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인재는 언제나 소수이다. 대다수는 인재상과 평가 방식에 따른 우선순위에 따라 자신의 능력치를 키우고 두각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아래 링크는 이와 관련해 작년에 쓴 글이다.
비 영미권 유학생의 경쟁력: 남다른 시각과 실체화시키는 능력

,

1. 조언에 관하여
나는 평소 말이 없다. 아마 남성 평균의 1/3 이하로 말을 하지 않나 싶다. 현재는 하루에 3 문장조차 내뱉지 않을 때도 많다. 반면 대화를 해야 하면 3시간 정도는 거뜬히 할수 있다. 내 상반된 모습을 보고 엇갈린 평가가 나올 수 있는데, 평소에 말이 없는 사람이지만, 대화는 잘 되는 사람으로 생각하면 된다.

나는 남에게 조언을 잘 하지 않는다. 원래 말이 없는 성격이기도 하고, 남의 인생에 개입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내 조언을 듣는다는 보장도 없어서 실없는 말을 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 내가 글을 쓰는 것과 유튜브 영상을 남기는 이유는 반복된 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하지만 일정 기간 관계를 맺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의도적으로 조언에 가까운 말들을 하곤 한다. 속된 말로 싹수가 있는 동생 뻘 사람들에게는 조언 투로 말하는 경우가 자주 있고, 진심으로 조언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시간을 기꺼이 내어준다.

내 성향과 무관하게 점차 사람들이 나를 찾아온다. 내가 교회나 교단, 학교 등 인적 기반이 탄탄한 편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알기 쉽지 않다.내 지인이나 유튜브, 블로그 등을 통해 알게 되어 연락을 해오는데, 그들의 노력과 간절함을 외면할 수 없어 상세히 답변해주고 있다.

조언자의 입장에서 설득이라는 욕심을 내려놓게 된다. 조언자와 피조언자 사이에 경험과 지식 등 서로 다른 기반을 갖고 있어서, 조언자로서는 최대한 현실적인 답을 해주고 싶고, 피조언자의 입장에서는 조언자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고 얻고 싶을 수 있으나, 실질적인 결과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2. 전도에 관하여
내 주변에는 기독교인들로 가득하다. 신학생 시절부터 시작해서 목사 안수를 받으니 제3의 인류로 구분되는 삶을 살고 있다. 현 전공마저 신학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향유하는 공간을 고려하면, 난 마치 기독교 세계에서 살아가는 듯하다.

난 일상의 삶으로 전도해야 한다고 믿는다. 한때 선교단체에서 전도 훈련을 받았고, 대대급 부대에서 군종병으로 선발되는 특별한 경험을 하고, 이러한 경력이 부교역자로 선발되는 데 득이 되었겠지만, 역시나 전도는 일상의 삶에서 해야 한다고 믿는다.

기독교 교리나 성경 교육 등은 기독교와 성경에 관심이 있을 때나 효과가 있다. 사영리나 기타 전도법으로 열심히 설명한다해도, 그 내용 자체로 교회를 다니겠다고 말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내 머리에 인상 깊게 남은 사람들은 대체로 이전에 교회를 다녔으나 시간이 지나 신앙 생활을 멀리 하게 되었다가, 나와 여러 사람들을 통해 다시 복음에 대해 듣고 나서 마음의 변화가 생긴 사례이다.

3. 설득하려고 하지마
안타까울 수 있으나 설득은 그다지 효과가 없다. 사람은 결국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그냥 자기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산다. 논리적이고 화려한 수사가 붙은 말로 설득을 시도해도 결과는 무용지물이다. 다만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다르다. 차라리 준비가 된 사람들을 찾는 쪽이 더 현명할 수 있다.

,

정보와 실행력

성찰 2023. 2. 17. 02:01

미국 칼빈 시절 A 목사님은 "유학은 정보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나는 이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실행력, 즉 개인의 역량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가장 큰 변수는 재정이라 논외로 한다)

솔직히 말해 수많은 유학 희망생이 정보가 없어서 유학을 못 가는가?

우선 출신 학교 교수들에게 유학에 관해 물으면 되고, 범위를 조금만 넓혀 국내 교수로 활동하는 분들에게 물어보면 웬만한 정보는 다 얻을 수 있다. 친절히 상담해주는 교수들은 자기 제자나 지인을 소개해주기도 한다.

좀 더 열심을 내어 본인이 관심을 두고 있는 학교 홈페이지만 봐도 필요한 정보가 다 있는데, 이상하게도 이 부분을 왜 간과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정보를 구하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활동이 뜸하지만, 여전히 나모스에서 필요한 정보는 구할 수 있을 거다.

유학을 결심하고 정보를 구해도 실질적으로 가장 먼저 공인어학성적을 획득해야 한다. 영미권의 경우 토플/아이엘츠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대형 어학원을 가보면 유학을 희망하는 수많은 수강생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희망 점수를 획득하고 유학을 가는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고 알고 있다. 교환학생 희망자가 가장 많아 보임. 유학 이전에 공인어학성적에서 좌절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공인어학성적을 취득하고 석사 과정에 입학한 이후에는 학업 성적에 따라 진로가 갈린다. 더하여 박사 과정 요구사항에 따라 진로가 갈린다. 간간이 석사 과정을 두세 번씩 하는 유학생들이 있는데, 그들이 왜 그러한 길을 걷고 있는지 생각해보라. 학업 성적이 박사 과정에 지원할 수준이 못 되거나, 성적 이외 요구사항을 충족하지 못했거나, 지원 후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해서 그렇다.

칼빈 시절 만난 한인 유학생들은 정보라면 다들 빠삭한 편이었다. 그리고 칼빈 박사 과정에 진학하려는 사람들은 교수들에 관한 사소한 정보까지 꿰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결과는 될놈될.

스코틀랜드로 와서 여러 사람을 만난다. 이들이 정보가 없어서 학교를 못 가는가? 아니다. 내가 볼 때 학교에 관한 정보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기본 실력이 있어서 그런지 바로 박사 과정에 입학해서 다니고 있다.

내가 유학을 결심하고 미국에서 석사 과정을 마친 후 지금은 스코틀랜드에서 박사 과정에 다니면서 축적된 지식과 경험은 결국 정보보다는 실행력이 더 중요하다는 결론으로 흐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