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Reid는 89:59–64에 등장하는 70 목자와 관찰자가 모두 인간이라고 본다. 그 이유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다만 그는 예언적 역사주의(mantic historicism)를 통해 이 단락을 지상 영역에서 펼쳐진 사건이라고 보는 듯 하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또다른 자’(another one, 89:61)를 복수로 해석하여 인간 관찰자들(human watchers)과 서기관들(the scribes)라고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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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kelsburg는 89:59–64이 지상 세계와 천상 세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1 Enoch, 388).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목양의 권한을 수임한 70 목자가 활동할 영역(59–60절)은 지상이며, 천사 서기관이 70 목자의 활동을 기록하고 하나님께 보고할 곳(61–64절)은 하늘 법정으로 본다.

또한 Nickelsburg는 이 단락의 배경이 하늘이라고 서술한다(1 Enoch, 389). 그의 관점에 의하면 지상에서 발생한 사건(54–58절) 이후 하늘 법정(59–64절)으로 공간이 바뀐다. 그는 ‘양의 주인’(=하나님)을 대신에 양떼를 치리할 ‘70 목자’와 목자의 관찰 임무를 수행할 ‘또다른 자’(another one, 89:61)는 천사라고 서술한다. 대다수 후대 연구자들은 Nickelsburg의 주장을 기반으로 개인의 연구를 개진하는 경향이 있다.

내 관찰에 의하면, 70 목자는 천사가 아니다. 한동안 나는 70 목자를 사람으로 가정했으나, 며칠 사이 중요한 발견을 통해 내 관점에 변화가 생겼다. 다행히 내 주장과 근거는 더 견고해짐. 현 단계에서는 70 목자를 여전히 지상적 존재라고 보고 있으며, ‘또다른 자’는 천사이며 서기관 역할을 한다고 가정하고 있음을 밝힌다.

내 주장과 근거를 제시하는 과정이 쉽지 않아서 ’70 목자의 천사설’을 헤아려보고자, Nickelsburg가 89:59–64의 배경을 하늘로 설정한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그는 지상에서 하늘로 바뀌는 공간 전환이 급작스럽다고 인정한다(1 Enoch, 389). 그럼에도 그의 공간 설정으로 위해 얻는 이득이 두 가지 정도 된다. 하나는 70 목자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과정이 쉬워진다. 대체로 ‘또다른 자’에 관해서는 이견이 없는 상황이다. Stephen Breck Reid가 ‘또다른 자’를 인간으로 간주하지만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내 관점에서는 Nickelsburg와 마찬가지로 하늘 서기관으로 보는 견해가 타당해 보인다. 여기서 또다른 이득이 발생하는데, 새로운 두 집단의 등장을 연출하는데 용이해진다. 70 목자를 지상적 존재로 보고 다른 인물을 하늘 서기관으로 보면, 하나님이 소환하는 장소가 지상과 하늘로 나뉘어 지고, 해설자 입장에서는 이 상황을 설명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배경을 하늘로 설정하면 이 두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다.

동물묵시록에 등장하는 인물은 지상적 존재와 천상적 존재로 나뉜다. 지상적 존재는 아담부터 인류를 지칭하며, 타락한 천사와 그의 후손이 포함된다. 천상적 존재는 하나님과 천사가 있다. 문제는 동물묵시록에서 70 목자의 기원과 외형을 설명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소환에 의해 홀연히 등장한다(89:59). 또한 ‘목자’라는 직위는 동물묵시록의 특징을 감안하면, 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데 혼란을 야기한다.

‘또다른 자’의 등장은 ’70 목자’의 정체를 규정하는 작업의 어려움을 더한다. 글의 흐름은 일련의 연속성을 갖고 있어서, 두 사건을 별개의 장소에서 발생했다고 단정짓기 쉽지 않다. 하나님의 소환이 발생한 장소가 한 곳(하늘 혹은 지상)이라는 입장과 두 곳이라는 주장 중 설명이 손쉬운 방향은 어디일까?

89:59–64의 배경을 하늘로 설정하면, 70 목자는 천사로 규정되며 두 집단의 소환은 한 곳에서 발생한 사건이 된다. 70 목자의 징벌을 설명하기도 쉬워진다. 하나님이 위임한 70 목자를 징벌할 근거는 확실해진다.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 범위를 넘어설 때이다. 하늘 서기관의 소환이 바로 이 지점과 맞물려 있다. 이것이 Nickelsburg가 89:59–64의 배경을 하늘로 설정한 이유이다.

나 역시 이러한 설명이 간결하다고 본다. 하지만 몇 가지 가정을 머리 속에서 돌려 보고 있는데,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 의문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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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e, Philip L. "Textual and Redactional Aspects of the Book of Dreams (1 Enich 83-90)." Biblical Theology Bulletin 31/3 (2001): 106-120. 아래 내용은 112쪽에서 가져옴.

 

This earthly destruction is also complemented with a cosmic judgment of seventy shepherds as well as a group of shepherds to keep account of the other, first, group of shepherds, making sure they note how many are killed by the first group beyond the allotted number permitted by God (89:61). Although the first group of shepherds likely refers to the nations used by God to bring judgment upon Israel-the reference to “seventy” alone indicates the nations of the world-the second group likly refers to an angelic or cosmic group of shepherds who keep records for future judgment. Davidson (104), however, holds that even the seventy shepherds are angelic beings set up by God to bring destruction to Israel. I am taking a slightly more cautious position, relating these shepherds to the nations of the world, an identification which is plausible given the number seventy. But the motif of angels standing over nations who war against one another should not be discounted (cf. Dan 10:10-14), and thus perhaps these seventy shepherds fit both Davidson’s angelic connection and my political connection.

 

본인은 입장은 70 목자는 '국가들'(the nations)이며, 그들의 행위를 기록하는 관찰자는 목자의 천상적 혼은 우주적 그룹으로 본다. 또한 70 목자의 천상적 존재를 주장하는 Davidson의 입장을 서술하며, 본인은 열방 가운데 70 국가를 가리키는 입장에 더 기운다고 밝힌다. 그런데, 마지막 결론에서는 천상적 존재를 지지하는 입장을 무시할 수 없다며, 70 목자는 Davison의 천성적 연결과 자신의 정치적 연결 모두 가능할거라는 입장으로 끝맺는다.

 

긍정적인 부분을 먼저 말하자면, 70 목자는 지상적 존재이고 관찰자는 천상적 존재라는 관찰이다. 현재 나는 한 장면에서 하나님은 서로 다른 차원의 존재들을 부르셨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나는 Tite가 관찰자를 목자로 보는 견해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목자의 천상적 혼은 우주적 그룹'이란 용어 자체가 생경하다. 난 그냥 천사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Davidson의 입장과 자신의 견해를 타협 혹은 융화하려는 시도이다. 내가 볼 때 두 입장은 섞일 수가 없다. 그냥 드는 생각은 저자 스스로 조심스럽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면서도, Davidson의 입장을 존중해주려는 차원에서 자신의 생각을 한 발 뒤로 빼준 모양새이다.

 

논외로, Tite는 노아와 모세의 변형을 다루면서 그들이 동물에서 사람으로 변했다고 진술한다. 하지만 그 존재가 실제로 사람인지 아니면 천상적 존재인지 다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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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묵시록에서 요시아 왕의 등장에 관한 서로 다른 주장이 존재한다. 하나는 요시아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주장이고, 또다른 하나는 요시아가 등장한다는 주장이다.

Nickelsburg는 요시아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한다(1 Enoch, 384). 그는 "국가적인 배교가 완성되었다; 그곳에는 더이상 선지자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The nation's apostasy is complete; there will be no more prophets)라는 표현을 쓴다. 이 말은 왕의 완악한 통치와 백성의 우상 숭배,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살해하는 태도 등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등졌다는 의미이다. 그는 선지자의 존재를 중요하게 보고 있다.

또한 Nickelsburg는 므낫세의 배교를 전복하는 요시아의 선한 통치에 대한 언급이 누락되어 있고, 선지자 예레미야의 사역과 메시지에 관한 언급 역시 생략되어 있다고 본다.

Nickelsburg의 입장과 달리 Laato는 요시아 왕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한다(The Chronology in the Animal Apocalypse of 1 Enoch 85–90, 3–19). 나는 진작 이 주장을 접했으나, 현재 시간적 압박을 받는 상황에 내 주제와 관련성이 깊지 않아서 세밀한 검토는 추후 작업으로 미뤄둔 상황이다. 현재로서는 내 입장은 조심스럽지만 Nickelsburg를 따르고 있다고 밝히겠다.

앞으로 내 견해가 달라질 가능성이 없지 않으나, 내가 Nickelsburg의 주장을 따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 에녹과 엘리야의 역할. 두 번째, 이스라엘의 배교에 그에 따른 종말론적 심판과 회복.

동물묵시록은 선지자들 가운데 엘리야의 비중을 높게 두고 있다. 설령 요시아 왕이 언급되었다는 입장을 취해도, 예레미야에 대한 진술이 생략되어 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엘리야의 중요성은 에녹과 연결하려는 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둘 사이에는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동물묵시록에서 에녹은 계시의 수령자라는 중대한 역할을 맡는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선지자이다. 에녹의 삶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는 엘리야와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 예외적인 경험을 한 사람이다. 또한, 종말론적 심판 이후 에녹과 엘리야가 지상으로 내려온다. 더 자세한 내용은 앞서 다룬 "동물묵시록에 나타난 계시와 비밀"을 보라.

요시아 왕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더라도, 이스라엘의 운명은 바뀌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배교는 전복되지 않고 지속되며,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 없다. 저자는 이스라엘의 배교에 따른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과 회복이라는 흐름 속에서 요시아 왕의 행적을 기록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 두 가지 이유로 인해 동물묵시록에서 요시아 왕과 선지자 예레미야를 다루지 않는다고 가정하고 있다.

혹시나 참고 문헌 정보가 필요하다면 아래 정보를 보라. 자료 표기는 각주 인용 방식으로 함.
Antti Laato, "The Chronology in the Animal Apocalypse of 1 Enoch 85–90,"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Pseudepigrapha, Vol 26.1 (2016): 3–19.
George W. E. Nickelsburg, 1 Enoch: A Commentary on the Book of 1 Enoch, ed. Klaus Baltzer, Hermeneia—a Critical and Historical Commentary on the Bible (Minneapolis, MN: Fortress,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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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논증법 명칭은 모르겠으나, 동일시의 오류로 보이는 주장을 반박하는 중이다. 현 학계에서는 70 목자를 천사로 주장하는 견해가 우세하다. 나는 70 목자가 지상적 존재라고 주장할 예정이다.

70 목자의 천사설을 주장하는 진영에서 논리가 가장 탄탄한 인물은 
George W. E. Nickelsburg이다. 후대 연구자들이 Nickelsburg의 주장을 계승하지만, 그들의 근거는 설득력이 덜하다.

내 짐작에 70 목자를 천사로 주장하는 근거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heaven [beings] with the appearance of white men"(1 Enoch 87:2)

노아와 모세의 변형을 천사로 주장하는 근거도 위 구절에 기반한다. 내가 볼 때 이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문자적 동일성.

노아의 변형을 언급하는 구절은 89:1, 9이다.
It was born a bull but became a man. (89:1)

That white bull who had become a man came out of that vessel, and the three bulls with him. (89:9)

모세의 변형을 언급하는 구절은 89:36, 38이다.
And I saw in this vision, until that sheep became a man and built a house for the Lord of the sheep and made all the sheep stand in that house, (89:36)

And that sheep that had led them, that had become a man, was separated from them and fell asleep, and all the sheep searched for him and cried bitterly because of him, (89:38)

노아와 모세의 변형에서 became a man과 had become a man라는 문구가 사용된다. 둘 다 사람이 되었다는 진술 이후 그 변형을 초래한 동기로 보이는 건축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다시 천사의 외모를 설명하는 구절을 보자.
heaven [beings] with the appearance of white men (87:2)

내가 주목하는 문구는 "the appearance of white men"이다. 천사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흰 색을 띄고 있다. 동물묵시록에서 색상은 해당 짐승의 속상을 반영한다. 그 중 흰 색은 거룩 혹은 순결함을 의미한다. 이 천상적 존재는 흰 색을 띄고 있다. 반면 타락한 천사의 후손은 검은 황소로 묘사되기도 한다(86:2). 또한, 천사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 나는 여기서 오해가 발생한다고 보는데, 사람의 형체를 갖고 있다는 것과 사람을 동일시해서는 안되다. 둘은 엄연히 다른 존재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둘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한다. 내 기준에서 말이다. 내가 볼 때는 어이가 없지만, 그 오류의 원인이 단순히 문자적 동일성에 있다.

현재 나 스스로 검증하면서 글을 쓰고 있어서 결론은 바뀔 수 있다. 그러나 내 주장이 더 설득력을 갖는다면, 천사와 사람을 동일시하는 해석이 우세한 현실에 대해 씁쓸함이 느껴지게 될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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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 C. Olson은 숫양이 왕을 의미한다면, 종말의 때에 등장하는 흰 황소(90:37)는 평범하게 예루살렘의 통치자를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또한 그 흰 황소는 다윗 계열의 왕권을 상징하는 모형이 아니라고 본다(A New Reading of the Animal Apocalypse of 1 Enoch, 167). 이 글에서는 숫양과 흰 황소로 주제를 한정한다. 다윗 계열의 구원자 사상(Davidic Messianism)에 관해서는 다음에 다룰 주제인데, 나 또한 에녹1서는 이 사상을 따르지 않는다고 가정한다고 밝힌다.

앞서 "동물묵시록에 나타난 황소와 숫양의 의미"와 "동물묵시록에 나타난 계시와 비밀"에서 자세히 다루었으므로, 여기에서는 간략하게 정리하겠다.

숫양은 왕이 아니라 지도자를 가리킨다. 지도자에서는 군사적 행정적 종교적 의미가 다 포함된다. 예외적으로 야곱은 이스라엘 국가의 시발점이자 열두 아들의 아버지로 숫양으로 나온다(89:12). 야곱의 아들 중에서는 요셉이 숫양으로 묘사된다(89:14). 군사적 행정적 지도자, 즉 왕 중에서는 사울(89:42), 다윗(89:46), 솔로몬(89:48b)이 숫양으로 묘사된다. 왕은 아니지만, 마카비 항쟁을 주도한 유다 마카비도 숫양으로 그려진다(90:13, 16). 종교적 지도자, 즉 선지자 중에는 하늘에서 하강하는 엘리야를 숫양으로 묘사한다(90:31). 이러한 용례를 통해서, 숫양은 단순히 왕에 한정되지 않고, 지도자에게 폭넓게 적용되는 상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종말론적 흰 황소(90:37)를 해석하려면 그의 등장 시점이 중요하다. 먼저 "큰 뿔 달린 숫양"이 등장하고 최후의 전쟁을 치른다(90:9–16). 흥미롭게도 이 숫양조차도 전쟁에서 힘겨워하며 '양의 주인'(=하나님)의 참전으로 승리하게 된다(90:12–19). 종말론적 전쟁 이후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된다(90:20–27). 새로운 성전이 건축되고(90:29), 이방 세력이 하나님을 예배하며(90:30), 에녹과 엘리야가 하강하고(90:31), 모든 양무리가 정결하게 된다(90:32). 이러한 일련의 종말론적 심판과 회복이 실현된 이후에 종말론적 흰 황소가 태어난다(90:37). 모든 맹수와 하늘의 새가 그를 두려워 한다(90:31). 여기에서 흰 황소의 등장은 족장 시대로의 회귀가 아니라 아담의 창조를 회복했다는 의미라는 Nickelsburg의 주장은 타당하다. 결론적으로, 이 흰 황소는 메시아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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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 C. Olson은 노아가 흰 황소에서 사람으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사람이 천사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A New Reading of the Animal Apocalypse of 1 Enoch, 158–9.). Olson은 노아가 천사가 되는 시점이 방주 건조 이전이라고 본다. 그의 논증이 갖는 문제는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천사들이 만들고 있다(67:2)는 구절을 토대로 노아가 천사라고 주장하는 데 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시는 시점에 천사들이 방주를 만들고 있다고 해서 노아가 천사와 동일시되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다. 무엇보다 두 구절은 장르가 다르다. 즉 노아의 변형은 동물묵시록이라는 장르적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만약 건축이 변형과 긴밀한 관계가 있더라도, 솔로몬의 성전과 궁전 건축이 그를 사람으로 변형되도록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즉 변형과 건축 이외에 요소가 존재한다는 암시를 놓쳐서는 안 된다. 또한, 노아가 천사로부터 비밀(mystery)을 들었을 때 전율했다(89:1)는 구절을 근거로 노아의 천사적 변형(an angelophany)에 따른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상적 존재로서 사람 역시 전율을 느낄 수 있으며, 심지어 동물조차도 두려움에 의한 전율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전율이 천사라는 근거는 성립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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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묵시록에서 동물에서 사람이 되는 사례가 있다. 노아와 모세가 그들이다. 둘다 변형이 건축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사람으로 변했다는 것이 천사가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동물의 한계를 극복한 존재를 사람으로 표현한다고 본다. 또한 사람과 천사는 다른 영역에 기반한 존재이다. 천사가 하강하여 활동할 때 사람의 형상(heaven [being] with the appearance of white men, 87:2)라고 설명한 이유가 그 근거이다. 사람과 천사는 다른 존재이다. 그러나 사람과 천사를 혼동하는 해석을 자주 본다. 더구나 솔로몬은 성전과 궁전을 건축했지만 사람이 되지 못했다. 단순히 변형을 건축과 한정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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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묵시록에서 하나님은 “양의 주인”(the Lord of the sheep)으로 지칭된다. 하나님이 양의 주인으로 처음 등장하는 계기는 양의 울부짖음에 대한 반응과 관련이 있다(89:16). 양의 주인으로서 그의 권위는 “지팡이”(the staff, 90:18)에서 나타난다. 지도자와 지팡이의 상관관계는 모세가 각 지파에서 지팡이를 하나씩 취하고 다시 지휘관들에게 돌려준 사건(민 17장)을 일례로 들 수 있다. 목축 사회에서 주인이 직접 목자로서 양무리를 보살피기도 하지만, 자신을 대신할 목자를 고용하기도 한다. 동물묵시록에서 하나님은 목자보다는 주인으로 등장한다. 그 특징이 “양의 주인”이란 칭호에서 잘 드러난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지도하는 실질적인 지도자는 모세이며, 그는 양으로 묘사된다(89:16–38). 이스라엘 왕국에서 첫 세 왕(사울, 다윗, 솔로몬)은 모두 숫양이었다. 이스라엘 멸망 이후 70 목자가 등장하는데, 그들은 특정 기간에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리도록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위임받은 자들이다(89:59). 동물묵시록에서는 하나님께 목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목자로 지칭하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목자보다는 주인의 역할로 해석해야 하는 경우가 더 많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양의 주인으로서 목자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사례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의 주인”과 같은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은 양으로 묘사된다는 점은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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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주인공인 에녹은 꿈을 통해 하늘의 계시를 전달받는다. 동물묵시록(1 Enoch 85–90) 에녹의 번째 꿈에 해당하며, 그는 자신이 내용을 아들 므두셀라에게 전한다 (85:1). 본문에서 에녹의 일생은 언급되지 않는다. 아담부터 셋의 계보(85:1–9) 노아 일대기의 시작(89:1) 사이에는 천사의 타락과 하늘의 심판(86:1–88:3) 다룬다. 에녹은 하늘의 심판에 관한 꿈에서 천사로부터 하늘로 들려 올려져 타락한 천사의 심판을 본다(87:2–88:3). 번째 심판의 대상은 타락한 천상적 존재이다(86:1–88:3). 타락한 천상적 존재는 지상 세계에 존재하는 악의 기원으로 간주된다.

노아의 가족은 모두 황소이다(89:1). 가족 구성원 가운데 노아만 비밀을 전수받으며, 그에게 비밀을 전수한 존재는 천사 명이다(89:1). 노아는 비밀을 듣고 두려움에 전율을 느낀다(89:1). 이어서 그는 황소로 태어났으나 사람이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89:1). 그는 자신을 위해 (편의상 앞으로 방주로 표기) 만들고 그의 가족이 안에 거한다(89:1). 홍수 심판은 지상적 존재를 대상으로 한다(89:2–8). 노아가 황소에서 사람이 되는 시점은 방주를 만들 당시로 보인다(cf. 89:1, 9).

에녹과 노아는 각각 천국의 계시와 비밀을 공유 받지만, 그들은 피심판자들에게 권면이나 회개를 선포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에녹은 하늘의 계시를 자신의 아들 므두셀라에게 가르쳐줄 뿐이다. 노아는 천사가 전해준 비밀을 통해 방주를 만들어서 그의 가족은 홍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지만, 비밀을 누구에게도 누설하지 않는다. 홍수 심판의 대상은 지상적 존재이다.

천상적 존재를 위한 일차 심판과 지상적 존재를 위한 이차 심판은 피할 없는 하늘의 뜻이다. 심판에 대한 에녹의 반응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에녹은 천상적 존재를 향한 일차 심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지상적 존재, 특히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심판에는 고통을 느낀다. 가령 에녹은 환상에서 하나님의 성전이 파괴당하고 (89:54)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세력으로부터 침략을 당하는 장면을 보고(89:55), 하나님께 구원을 간청한다(89:57).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침묵하신다(89:58). 하나님의 침묵은 심판의 필연성을 의미한다.

모세의 역할은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 유대 전통에서 모세는 선지자의 원형으로 간주된다. 모세의 선지자 직분에 관해서는 Wayne Meeks The Prophet-King: Moses Traditions and Johannine Christology (Leiden: Brill, 1967, 최근 복간본은 Eugene, OR: Wipf and Stock Publishers, 2017) 주요한 자료이다. 모세의 선지자 직분에 관해서는 예외적인 적용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가 유일무이하게 하나님을 대면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에녹1서는 이러한 관점을 수용하지 않는 듯하다. 양이 높은 바위의 꼭대기에 올라갔다가 다시 양떼로 돌아온다(89:29). 이후 줄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시내산 사건과 흐름이 비슷하다. 동물묵시록에서 주요 인물의 일생을 간략하게 진술하는 특징을 고려한다면, 하나님의 시내산 현현은 꽤나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89:29–35). 그러나 시내산 이야기에서 중요한 사건인 돌판 수령은 언급하지 않는다. 지점에서 Nickelsburg 양떼의 눈이 열리는 현상(89:28) 계시와 관련이 있고, 이와 반대로 눈멈(blindness) 배교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1 Enoch, 380–1). 주장에 관해서는 면밀한 관찰과 비평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차후에 다룰 예정이다. 내가 주목하는 특징은 에녹 1서에 모세의 돌판 수령에 관한 진술이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과 독대한 사건을 모세의 선지자 직분의 명분으로 삼는 전통은 차치하더라도, 고대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관련된 돌판 수령을 생략한 이유를 고민해 필요가 있다. 부분에서 에녹 1서가 율법주의(legalism) 주목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어쩌면 심판의 필연성은 율법 준수 여부와 무관하다고 믿어서 부분을 언급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모세에 관해서 언급해야 또다른 특징은 그는 양으로 묘사되지만, 후에 사람이 된다는 진술이다. 여기서 천상적 존재와 구별해야 한다. 천상적 존재는 사람의 형상(heaven [beings] with the appearance of white men, 87:2) 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 사람은 아니다.

엘리야(89:52) 대한 진술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선지자 전통을 중요시했던 고대 이스라엘의 통념과 달리 동물묵시록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선지자는 엘리야가 유일하다. 엘리야를 포함한 모든 선지자는 양으로 묘사되고, 그들의 사역은 실패로 끝난다(89:51–53). 다만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지만(89:51), 유일하게 엘리야는 건짐을 받고 하늘로 올림을 받는다(89:52). 엘리야에 관한 독특한 진술은 승천한 엘리야가 종말의 때에 하강한다는 기록이다(90:31). 하강하는 숫양의 정체에 관해서는 유다 마카비와 엘리야를 두고 논쟁이 있는데, 나는 엘리야가 적합하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Nickelsburg 지적한대로, 유다 마카비는 승천했다는 기록이 없다(1 Enoch, 405). 천상적 존재가 아닌 이상 지상적 존재는 승천이 선행되어야 하강이 가능하다. 이때 엘리야는 숫양으로 묘사된다. 엘리야는 지상에서 양으로 묘사되었다가 하강할 때에는 숫양으로 그려진다. 또한 에녹과 같이 하강하는 인물이라면, 유다 마카비가 아닌 엘리야가 개연성이 크다. 여기서 에녹과 엘리야의 공통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이에는 여러 차이점이 존재하지만, 승천을 경험한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지상에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승천이라는 경이로운 경험은 에녹 1서에서 에녹이 계시 수령자가 되는 근거이자, 엘리야가 최후의 날에 숫양으로 하강한다고 묘사되는 이유로 작용한다. 엘리야가 왕국 분열의 종말과 관련된 인물이라서 중요하게 서술되었다는 주장이 있음(Fröhlich, “Symbolical Language,” 630–631. Chae, Jesus as the Eschatological Davidic Shepherd, 99, n.19에서 재인용).

동물묵시록에서 모세의 돌판 수령과 엘리야를 포함한 선지자의 사역에 비중을 두지 않는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종말의 때에 닥칠 이스라엘의 멸망과 회복은 하나님의 뜻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율법과 예언을 준수한다고 해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바뀌지 않는다. 실제 역사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율법과 예언을 준수한 시기보다 배역한 기간이 길다. 이러한 믿음이 모세와 선지자에 관한 진술에 묻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정리하자면, 에녹 1서는 율법과 예언의 중요성보다는 종말론적 심판과 구원의 현실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에녹 1서의 결정론적 관점은 ”(90:17) 존재에서 드러난다. 동물묵시록에서 심판이 실행될 책이 언급되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특징에는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해석하는 에녹 1서의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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