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목자는 130~140년경 로마에서 비오 교황(140~155년)의 형제인 헤르마스가 저술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고대 교회의 일부 공동체에서 전례 때 공식적으로 낭독되고 경전으로 인정될 만큼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목자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세례를 받은 뒤 죄를 지은 그리스도인에게 구원의 방법을 제시하는 회개이다. 고대교회의 회개는 오늘날의 고해성사에 해당한다.

복음서와 사도들의 편지를 보면 사람들이 서로 죄의 용서를 청하기도 하고 용서를 받기도 하는 모습이 확인된다. 그런데 고대교회에서 참회한 죄인들의 모든 죄는 늘 용서받는다는 확신이 이후로도 계속 변하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요한의 첫째 편지에는 이러한 변화를 암시하는 몇몇 구절이 있다. 『한번 빛을 받아서 하늘이 내린 선물을 맛보고 성령을 나누어 받는 이들이, 그리고 하느님의 선한 말씀과 앞으로 올 세상의 권세를 맛본 이들이 이제 배반하고 떨어져 나간다면 다시는 회개하여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하느님의 아드님을 거듭 십자가에 못박고 모욕하는 것입니다』(히브 6, 4-6).

2?3세기에 노바티아누스파와 다른 엄격주의자들은 이 구절들을 엄격한 회개의 의미로 해석하였다. 또한 세례 후 중죄를 지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마침내는 공동체에서 내보내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한편 다른 이들은 매우 권위적이고 결정적인 이 문구들을 엄격한 규율 조치로서보다는 당시의 절박한 상황에 대처할 교훈적 경고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히브 6, 4에서 말하는 회개의 불가능은 원칙적 불가능이 아니라, 대개 배교자는 다시 회심하기 어렵다는 것을 경험상 알 수 있기 때문에 허구적 불가능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회개가 고대교회에서 어떻게 개별적으로 행해졌는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불분명하다. 다만 1~2세기 전환기와 2세기 전반기에 씌어진 일부 작품에서 회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목자의 회개론은 2세기 중엽의 신학 발전을 이끄는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회개 논쟁은, 세례를 받은 뒤 회개를 금하는 당시의 상황에서 헤르마스가 처음으로 세례 후의 회개와 용서를 선포하였는지, 아니면 여러 번에 걸쳐 이루어진 회개를 단 한 번으로 제한하였는지에 관한 문제에서 출발하였다. 첫째 경우는 헤르마스가 교회의 성성 때문에 세례 후 회개를 거부한 원시 그리스도교의 엄격함을 완화하였다는 입장이고, 둘째 경우는 그가 단 한 번으로 제한된, 일반적인 회개 관습을 강화하였다는 입장이다. 지금까지 논의된 본문을 바탕으로 살펴보면 둘째 해석이 더 그럴듯하다. 왜냐하면 실제로 교회는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서 절대로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엄격한 조건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그리하여 회개할 뜻이 있는 죄인을 교회에 다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헤르마스가 세례 후 회개를 한 번 더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세운 것은 이전의 관대한 관습을 더 엄격하게 강화한 것이라 하겠다. 그 이후로 고대 그리스도교는 세례를 받은 뒤 다시 지은 죄에 대해 한 번의 회개만 허용하였다.

한 번만 허용된 고대교회의 엄격한 회개는 신자들에게 크나큰 희생을 요구하는 엘리트 교회의 관습이었다. 이 때문에 이미 테르툴리아누스 이래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공개적인 회개 조치로 자기 약점이 온 세상에 드러나게 되자 수치심을 느끼고 회개를 멀리하였다. 그리하여 신자들이 교회의 용서를 얻기보다 오히려 죄지은 상태에 머무르려 한다는 개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러한 개탄은, 콘스탄티누스가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 뒤 많은 사람이 교회로 몰려들면서 더 심화되었다.

교회는 새로운 상황을 맞으면서도 유연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 많은 점에서 회개 규정들을 더욱 강화하였다. 특히 일회적 회개 원칙은 서방에서 철저히 지켜졌다. 이 경우 회개에 부과된 보속이 강화되어 -예를 들어 평생 성관계를 갖지 않는 것- 지키기도 힘들고 어렵게 되자 회개는 점점 더 임종 때까지 연기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회개한 사람은 교회에 받아들여진 뒤 거의 수도자와 같은 생활을 해야 했다. 게다가 회개를 하고 나면 일반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권리를 갖지 못하게 하여, 성직자가 될 수 없으며, 어떤 공적인 교직도 맡지 못했다.

회개는 세례의 특성처럼 한 번밖에 할 수 없다는 생각이 확고해지면서 적지 않은 문제가 뒤따랐고, 회개 제도 전체가 위기에 빠졌다. 죄를 지은 그리스도인은 교회에서 정한 회개를 죽을 때까지 연기하기 시작하였고, 교회는 이를 감수해야만 했다. 더구나 506년 아그드 교회회의는 사목적인 이유에서 35세 이하의 젊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금하였다. 538년 오를레앙 교회회의는 나이 든 이들도 배우자의 동의가 있을 때만 회개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로써 회개는 실제 삶에서 멀어져 사랑과 용서의 공동체 성격이 사라지고, 생명을 위한 용서의 성사가 죽음을 준비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러한 풍조는 세례 자체에도 영향을 미쳤다. 사람들은 세례 후 회개하는 것보다 평생 세례지원자로 있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여 세례를 죽을 때까지 미루었다. 사람들은 「세례복을 입은 채 사망한」이라는 표현을 묘비에 자랑스럽게 기록하였다.

이 갈등상황의 해결은 5~6세기에 접어들어 세계의 변두리인 아일랜드와 영국에서 사목적 필요성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 지역 사람들은 먼저 공개적인 회개를 포기하기 시작하고, 주교나 사제, 수도자에게 개인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보속을 받았다. 이는 아일랜드와 영국이 대륙 선교를 나서면서 서방에 널리 퍼져 일반적인 해결책이 되었다. 모든 신자가 해마다 한 번씩 고해성사를 보아야 한다는 규정은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결정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하성수 박사(한님성서연구소)


[출처] 교부들의 가르침 (6) 헤르마스의 목자 / 하성수 박사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article_view.php?aid=139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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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mnant Motif in the Context of Judgment and Salvation in the Book of Jeremiah by Dr. Kenneth D. Mulzac

https://digitalcommons.andrews.edu/dissertations/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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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

추천자료 2017. 1. 26. 11:55

<구원의 확신>
신앙에서 구원의 확신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지만, 과연 100% 확신할 수 있을까요?
토마스 슈라이너가 대답합니다.

출처 : http://equip.sbts.edu/video/can-100-assurance-salv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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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과 언약으로 읽는 그리스도의 구원』 (우병훈, SFC)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불현듯 '나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구원을 얻는 자들에 속하는가?'라는 의문이 드는 때가 있다. 죄책감을 느꼈거나 자신의 믿음 없음을 발견했을 때 그렇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구원 받을 자들을 예비하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그렇게 교회에서 가르침을 받으므로, 누구나 한번쯤은 고민해보게 되는 질문이다.

이러한 탐구는 자연스럽게 예정론으로 이어지고, 그에 대한 답변은 늘상 자신이 소속한 교회의 교단에 따라 이중예정이나 예지예정 둘 중 하나로 결론짓게 된다. (이러한 흐름은 어느 정도의 신학적 훈련이 되어 있을 때나 가능한 거고, 대개의 경우는  낙심하지 말고 더욱더 굳세게 신앙생활하라고 권면을 받는게 현실이지만 말이다.)

이 책에서는 예정론에 앞서 1장에서 구원론과 기독론에 대해서 다루면서, 십자가에 매달리심으로 구원사역을 감당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도모한다. 2장에서는 예정과 언약의 관계를 살피면서, 오랫동안 오해되어 왔던 구원에서의 언약의 위치를 바로 잡아준다. 최근 들어 언약신학의 비중이 커지면서 예정론과 상반되는 이론인듯 오해되어 온 부분을 지적하고 둘 사이의 관계를 바로잡아 준다. 3장에서는 언약신학을 중심으로 예정을 이해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특히, 칼빈과 바빙크의 저술을 중심으로 예정과 언약의 상호관계를 간결하게 다루고 있다.

지금껏 예정론과 언약신학에 대한 개별적인 연구는 저마다 심도깊게 다뤄져 왔는데, 본서에서 이 두 신학을 연결하여 구원론을 다룬점은 실로 기여하는 바가 크다. 구원론, 예정론, 언약신학에 관심있다면, 일독을 권한다.


예정과 언약으로 읽는 그리스도의 구원
국내도서
저자 : 우병훈
출판 : SFC(학생신앙운동) 2013.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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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구원을 선포한 이유를 자신의 사명과 연결 지어 설명한다.[1]예수께서는 잃어버린 것을 찾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 이러한 예수의 사역은 에스겔 34장의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를 연상시킨다.[2]에스겔 34장은 백성들을 향한 의무를 무책임하게 등져버리고 개인의 탐욕에 빠져버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하나님에 의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다루고 있다.[3]즉 에스겔 34장은 일차적으로 정치적 관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예수의 사역이 에스겔 34장과 연결될 가능성을 배제하기도 한다.[4]하지만 에스겔 34장은 새출애굽 모티프를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5]특히 ‘찾다’라는 의미의 דרשׁ는 잃어버린 양에 대한 목자의 헌신적인 사랑과 노력을 나타낸다.[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시겠다고 말씀하셨으며( 34),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명을 통해 이 약속을 이루신다.[7]또한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 목자 비유도 연상시킨다(4, 6).[8] 이 비유에서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까지 찾는다(15:4).[9] 안전한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더 특별한 관심을 받고 있다.[10] 그 결과는 성공적이다(15:5).[11]목자는 친구와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자신의 기쁨을 함께 나눈다(15:6).[12]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자신의 사역에 적용하셔서 하늘의 관점과 기쁨의 강도를 강조하신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15:7).[13]이 구절에서 회개에 대한 누가의 이해가 드러난다.[14] 누가복음에서 회개는 중요한 주제로, 삶의 변화를 의미한다(3:3, 8; 13:1-5; 15:7, 10; 16:30; 17:3-4; 24:47).[15] 그리고 회개는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결과가 아닌 구원자에 의해 이뤄지는 경험이다.[16] “이 비유는 하나님의 성품과 예수의 사명을 정의하는데 도움을 준다.[17] 결국 삭개오가 예수를 보기 위해 시도했던 노력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모습에서 그의 자발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나, 모든 결과는 예수의 사역에 달려있다.[18]예수의 사명과 죄인의 회개에 대한 말씀은 5:31-32를 떠오르게 한다.[19]예수께서는 죄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오셨다(5:32).[20] 이 비유에서 건강한 자는 의인과 병든 자는 죄인과 연결된다(5:31-32).[21] 비록 예수의 제자들을 비방한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의인으로 언급되었지만, 그들을 의인으로 인정한다는 의미는 아니다.[22]오히려 그들은 비난의 대상이다(특히, 11:37-52).[23]일반적으로 잃어버린 양은 “‘하나님의 언약을 떠난 죄인’ 혹은 ‘악인’과 동의어”로 사용된다.[24]하지만, 예수께서는 죄인을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으로 이해했다.[25]따라서 이 비유는 모든 사람들이 치료의 필요를 인정해야 한다고 가르쳐 준다.[26]물론 여기서 치료는 육체적인 질병을 위한 치료가 아니라, 다른 종류의 치료이다.[27]삭개오와 그의 집은 ‘잃어버린 것’에 해당한다.[28] 이 비유에서처럼 삭개오와 그의 집은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의미, 가치를 상실한 상태였으나, 예수로 인해 회복되었다.[29] 이 이야기는 청중/독자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갖게 된다.[30]삭개오처럼 공동체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수군거렸던 무리들과 같은 경향의 집단에게는 예수의 사명의 의미를 일깨우도록 도전하게 된다.[31]부자들에게는 자발적으로 회심한 부자의 사례를 제공한다.[32] 삭개오 이전에도 부자가 예수께로 나온 경우가 있었지만, 그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33]특히, 부자 관원이 그렇다(18:18-30). 하지만 삭개오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내놓기로 약속했고 구원을 받는다. 삭개오를 통해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18:27)라는 예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1] Bock, Luke 9:51-24:53, 1523; Tannehill, Luke, 278; OHanlon,The Story of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8.

[2] Bock, Luke 9:51-24:53, 1523;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8; OHanlon,Zacchaeus and the Lukan Ethic,18.

[3] Walther Zimmerli, Ezekiel 2: A Commentary on the Book of the Prophet Ezekiel Chapters 25:48, Hermeneia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3) 222.

[4] Tannehill,Luke, 278.

[5] Leslie C. Allen, Ezekiel 20-48, Word Biblical Commentary, Vol.29 (Dallas: Word, 1990) 162.

[6] Allen, Ezekiel 20-48, 162.

[7] Allen, Ezekiel 20-48, 165; Bock, Luke 9:51-24:53, 1523.

[8] Bock, Luke 9:51-24:53, 1523;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8; Tannehill, Luke, 278; OHanlon,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8.

[9] Bock, Luke 9:51-24:53, 1300.

[10] Bock, Luke 9:51-24:53, 1300.

[11] Bock, Luke 9:51-24:53, 1301.

[12] Bock, Luke 9:51-24:53, 1301.

[13] Bock, Luke 9:51-24:53, 1302; Tannehill, Luke, 238.

[14] Tannehill,Luke, 238.

[15] Bock, Luke 1:1-9:50, 499.

[16] Tannehill,Luke, 238.

[17] Tannehill,Luke, 239.

[18] Tannehill,Luke, 278.

[19] Bock, Luke 9:51-24:53, 1302.

[20] Bock, Luke 1:1-9:50, 498; Bock, Luke 9:51-24:53, 1523.

[21] Bock, Luke 1:1-9:50, 498.

[22] Bock, Luke 1:1-9:50, 498; Tannehill, Luke, 238.

[23] Bock, Luke 1:1-9:50, 499; Tannehill, Luke, 238.

[24] Evans, Saint Luke, 664.

[25] Bock, Luke 1:1-9:50, 499.

[26] Bock, Luke 1:1-9:50, 499.

[27] Bock, Luke 1:1-9:50, 498.

[28] OHanlon,The Story of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9.

[29] OHanlon,The Story of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9.

[30] Tannehill,Luke, 278.

[31] Tannehill,Luke, 278.

[32] Tannehill,Luke, 278-279.

[33] Bock, Luke 9:51-24:53,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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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의 다짐을 들은 예수는 그에게 말씀하신다.[1]하지만 예수께서는 삭개오와 주위에 모여 있던 사람들까지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다.[2]삭개오가 사람들의 불평을 의식하고 있다면(7-8),[3]예수께서도 이들을 의식하고 계셨을 터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무리들의 반응(7)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4]예수께서는 삭개오의 집에 구원을 선포하시고, 그 이유가 삭개오 역시 아브라함의 아들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신다.[5]누가복음에서 σωτηρία는 총 3번 사용되었으며(1:69, 71, 77), 이 구절들은 모두 예수와 세례 요한의 사역을 예고하는 사가랴의 예언과 관련이 있다.[6]사가랴의 예언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맹세에 따라 구원을 베푸신다(1:68-73).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자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한다(3:8). 그에게 회개는 신학이나 종교의식의 변화가 아닌 삶의 변화이다.[7]그래서 요한은 무엇을 해야 되는지 묻는 세리들에게 부과된 세금만 걷으라고 답한다(3:13).[8]결코 직업을 변경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9] 그렇다면 세리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공정한 세금 징수이다(3:12-13).[10] 따라서 삭개오의 회개에 대한 기록이 없어도, 그에 상응하는 신앙고백을 했다고 볼 수 있다(8절 주해).[11] 더 중요한 점은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죄와 회개를 연관 짓지만(5:32; 13:2-3; 15:7, 10; 17:3-4), 회개에 대한 언급이 없어도 죄를 용서하신다(5:20-24; 7:47-49).[12] 또한 누가복음은 세리의 반응을 긍정적으로 묘사한다(5:27-30; 7:29, 34; 15:1; 18:9-14).[13]실제로 세리들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했으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3:12). 그리고 결국에는 요한의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드러냈다(7:29).[14]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한 세리 역시 의롭게 여겨졌다(8:14). 구원의 대상은 삭개오와 그의 집 전체를 포함하며, 이와 같은 사건은 사도행전에서도 나타난다(10:2; 11:14; 16:15, 31; 18:8).[15]


[1] Bock, Luke 9:51-24:53, 1522.

[2] Bock, Luke 9:51-24:53, 1522.

[3]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7.

[4] Robert C. Tannehill, Luke, Abingdon New Testament Commentaries (Nashville: Abingdon Press, 1996) 278.

[5] Evans, Luke, 280.

[6]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8.

[7] Evans, Luke, 48..

[8] Bock, Luke 1:1-9:50, 312.

[9] Bock, Luke 1:1-9:50, 312.

[10] Bock, Luke 1:1-9:50, 312; Double, The Paradox of Salvation, 116.

[11] Ravens, "Zacchaeus: The Final Part of a Lucan Triptych?," 23.

[12] Ravens, "Zacchaeus: The Final Part of a Lucan Triptych?," 23. 삭개오가 죄를 고백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의 무죄를 입증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18:9-14)를 근거로 삭개오의 무죄를 주장하는 시도가 있다(Evans, Luke, 280).

[13] Bock, Luke 1:1-9:50, 310; Ravens, "Zacchaeus: The Final Part of a Lucan Triptych?," 22.

[14] Ravens, "Zacchaeus: The Final Part of a Lucan Triptych?," 22.

[15] Bock, Luke 9:51-24:53, 1522;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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καὶ ἰδοὺ는 셈어적 표현으로,[1] 청자/독자의 주의를 끌어들이기 위한 기법이다.[2] 새 글 여는 공식(introduction formula)이기도 하다.[3]καὶ ἰδοὺ ἀνὴρ은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킬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5:12; 9:38; 23:50; 8:27; 10:30).[4] 여기에서는 삭개오를 등장시키며 세리장이자 부자로 소개하고 있다.[5] 누가복음에서는 ὄνομα 혹은 καλέω + 이름으로 사람을 언급하는데,[6]두 단어를 같이 쓰는 경우는 누가복음 1:13καλέσεις τὸ ὄνομα αὐτοῦ Ἰωάννην와 같이 이름을 지어줄 때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사람을 소개하는데 ὀνόματι καλούμενος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므로, 중복적인 표현(pleonastic)이라 할 수 있다.[7]이러한 중복적인 표현은 “삭개오의 이름에 특별한 주의를 끌려는데 목적이 있을 것이다.[8] Ζακχαῖος는 의로운 자(Righteous One)라는 의미의זַכַּי에서 유래되었고,[9]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유대인이다.[10]직업은 세리장(ἀρχιτελώνης)으로 세리들을 관리하고 여리고 지역의 세금 징수를 책임지는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11]그리고 삭개오는 부자이다. 인칭대명사의 주격은 대조 혹은 강조를 위해 사용되므로,[12]여기에서 αὐτὸς는 삭개오가 세리장이자 부자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참조 17:16).[13]이러한 진술은 그가 세리장이라는 직업을 통해 부자가 되었음을 암시하려는 듯싶다.[14]여리고는 무역중심지이자 지방세무서였으므로, 세리장이었던 삭개오는 로마정부로부터 막대한 수수료(commission)를 받아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15]하지만 세리장이자 부자(καὶ αὐτὸς ἦν ἀρχιτελώνης καὶ αὐτὸς πλούσιος)라는 소개는 삭개오가 자신의 직위를 악용하여 부자가 된 인물로 그려지도록 한다.[16] 실제로 그는 죄인 취급을 받았다(7). 이러한 소개는 그의 이름의 의미를 무색하게 만든다.[17]하지만 세리장인 삭개오의 등장은 청자/독자들로 하여금 예수의 반응에 관심을 갖도록 한다.[18]예수는 세리들의 친구이기 때문이다(7:34).[19] 더구나 삭개오는 부자였으므로 부자 관원에서 제기되었던 질문이 떠오르도록 한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18:26).[20]사실 삭개오에 대한 소개는 긍정적인 동시에 부정적이다. 당시 사람들과는 정반대되는 평가이지만, 누가는 세리를 긍정적으로(3:12; 5:27; 7:29; 15:1; 18:10),[21]부자는 부정적으로 본다(16:22-23; 18:23). 일례로 부자 관원은 어려서부터 계명을 다 지켜왔다고 했으나, 예수의 요청에는 근심할 따름이다(18:21-23).부자 관원에게 있어 부는 예수의 명령에 순종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인 것이다.[22]또한 부자 관원의 태도(18:21)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18:9-14)에서의 바리새인과 평행된다.[23] 이 비유에서 바리새인은 자신을 의롭게 여기지만(18:11-12), 예수께서는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태도를 비난하셨다(16:14-15; 18:9-14).[24] 부자 관원은 예수께서 언급하신 계명은 어려서부터 지켜왔다고 답하지만, 그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18:20-22). 그래서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명령하신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18:22). 하지만 부자 관원은 예수의 말씀에 근심하였다(18:23). 비록 예수께서 언급한 계명은 다 지켰다고 대답했지만, 재물에 대한 탐욕은 버리지 못한 자이다(18:23). 그래서 예수께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말씀하셨다(18;24-25). 그렇다면 세리장이자 부자인 삭개오는 어떻게 될 것인가?



[1] BDF §442.

[2]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3] Francois Bovon, Luke 1: A Commentary on the Gospel of Luke 1:1-9:50, trans. Christine M. Thomas, Hermeneia (Minneapolis, MN: Augsburg Fortress, 2002), 173.

[4] 이 밖에 καὶ ἰδοὺ ἄνδρες5:18; 9:30; 24:4; 1:10

[5] Bock, Luke 9:51-24:53, 1516.

[6] ὄνομα 8(1:5, 27; 2:25; 5:27; 8:41; 10:38; 16:20; 23:50), καλέω 2(1:60; 10:39) 사용되었다.

[7] Nolland, Luke 18:35-24:53, 907; O Hanlon, The Story of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2.

[8]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O Hanlon, The Story of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2.

[9] Bock, Luke 9:51-24:53, 1516; Godet, Commentary on the Gospel of Luke, 216;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Stein, Luke, 468; OHanlon, The Story of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2; Christopher F. Evans, Saint Luke, TPI New Testament Commentaries (London: SCM Press, 1990), 661.

[10] Bock, Luke 9:51-24:53, 1517; Godet, Commentary on the Gospel of Luke, 216;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O Hanlon, The Story of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12.

[11]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12] BDF §277.

[13] 17:16에서 누가는 한센병을 치유 받은 열 사람 중에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한 자가 이방인 취급을 받는 사마리아인이었다고 밝힌다.

[14] Bock, Luke 9:51-24:53, 1516; Evans, Luke, 282; Fitzm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X-XXIV, 1223;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OHanlon, The Story of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2.

[15] Bock, Luke 9:51-24:53, 1516.

[16]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O Hanlon, The Story of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2.

[17] Bock, Luke 9:51-24:53, 1516.

[18]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19]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20] Frederick W. Danker, Jesus and the New Age: A Commentary on St. Lukes Gospel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8), 304.

[21] Bock, Luke 9:51-24:53, 1513 n.2.

[22] Bock, Luke 9:51-24:53, 1483; Danker, Jesus and the New Age, 304.

[23] Bock, Luke 9:51-24:53, 1473.

[24] Bock, Luke 9:51-24:53, 1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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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J. Tissot, detail from "Zacchaeus in the Sycamore Awaiting the Passage of Jesus" (1886-1896), watercolor, Brooklyn Museum, New York.

누가복음 주석서들을 읽다보면, 삭개오 이야기(19:1-10)에서 동사 δίδωμιἀποδίδωμι를 미래적 현재로 해석하는 경향이 발견된다. 이러한 경향을 보이는 학자들은 본문에 사용된 형태에 따라 습관적 현재로 해석해야 하지만, 그렇게 할 경우에 부딪히게 되는 해석의 어려움을 이유로 미래적 현재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경향을 정당화한다.[1]

이 동사는 예수를 만난 결과 삭개오의 회개와 믿음을 반영하기 때문에 동사는 현재 결심의 뜻으로 이해하는 게 더 적당해 보인다. 행동이 구체적인 표현에서 믿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믿음은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행동이 믿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며,이러한 행동은 죄인인 한 여인(7:36-50)의 경우만큼이나 세례 요한의 가르침이 생각나도록 한다. 사실, 19:9-10에서 구원과 잃어버린 자에 대한 구원에 대한 예수의 언급은 사실상 그들이 마음을 바꾸었다고 간주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동사들을 현재의 행위가 아닌 미래의 결심으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삭개오의 예수와의 만남은 그의 돈을 처리하는 방식을 바꿨다⏤사람들에게서 이익을 챙기는 것에서부터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까지.[2]


8절은 세리장으로서 세금을 토색해온 과오를 반성하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데 자신의 재물의 절반을 내놓으며, 앞으로 토색하는 일이 발생할 경우에는 네 배로 갚아주겠다는 고백이라는 것이다. 본문에서도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하는 듯이 보인다.세리장인 동시에 부자라는 소개는 삭개오가 세리장이라는 지위를 남용하여 부자가 되었고(2),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삭개오를 죄인으로 여긴다(7). 무엇보다, 10절에서 예수께서 잃어버린 양을 위해 오셨다는 말씀은 15:1-7를 연상시키서 회개하는 죄인으로 해석하도록 만든다. 이렇든 미래적 현재로의 번역은 해석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주며, 결국에는 삭개오의 회심으로 초점을 맞추게 된다.

하지만, Crag A. Evans는 본문에 삭개오의 회개에 대한 단서가 없으며, 무엇보다 원문은 습관적 현재로 해석하도록 요구하고 있다며 미래적 현재의 해석에 의문을 제기한다.[3] Evans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습관적 현재에 따른 해석도 제시한다.

8절에 더욱 적절한 해석은 “죄인”인 세리에게 청하시고 그와 식사하려는 예수의 의도에 불평하는 군중(7)을 향한 삭개오의 진술을 즉각적인 변론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삭개오는 무런 이유 없이 단지 그의 직업 때문에 죄인이라 불리는 비꼼(sting)에 대한 반응이다. 사실상 그는 다른 세리들이 시민들을 속이고 착취한다지만, 삭개오 자신은 정기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기부를 하고 있고 (뜻하지 않게) 더 많은 돈을 걷었을 때 마다 (반드시 “토색했다”고 볼 수는 없다) 항상 네 배로 갚아주고 있다고 변론한다.

9절에서 예수께서는 삭개오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신다. 그 이유는 그의 공정한 행동(3:12-13에 기록된 세례 요한의 세리들을 향한 충고를 떠오르게 한다) 때문으로 이러한 행위는 신실한 마음을 암시하며, 이러한 마음은 하나님 나라의 초대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아브라함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가 예수를 환영하는 모습이 입증하듯이,구원이 그의 집에 이르렀다 (경멸 받는 세리의 집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다시 우리는 추방된 자들과 부당한 전제와 종교적인 위선 때문에 해를 당하는 자들을 옹호하는 역할을 맡은 예수를 보게 된다.[4]


이렇듯 습관적 현재에 따른 해석은 모든 사람들이 삭개오를 죄인으로 취급한 이유(7)와 예수께서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씀하신 이유(9) 그리고 잃어버린 양 비유(10)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즉 이러한 해석을 따를 경우 삭개오 이야기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새롭게 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동사 δίδωμιἀποδίδωμι를 미래적 현재냐 습관적 현재냐 하는 사소해 보이는 문제에서 시작하지만, 주해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대단하다.

여기서 해석자는 두 가지 해석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든 해석자의 선택이 저자의 의도에 부합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는 없다. 그래서 이 연구의 목적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누가의 동사δίδωμιἀποδίδωμι의 용례를 분석하여 두 동사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 연구하고, 그에 따른 본문의 해석을 제시하는데 있다.


[1] 대다수의 학자들이 이러한 견해를 따르며, 대표적인 인물로는, Darrell L. Bock, I. H. Marshall, Robert H. Stein 등이 있다.

[2] Darrell L. Bock, Luke 9:51-24:53, Baker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Baker Books, 1996), 1520.

[3] Craig A. Evans,Luke, New International Biblical Commentary, Vol. 3 (Peabody: Hendrickson Publishers, 1990), 280.

[4] Evans, Luke, 280. Evans의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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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신명기 6 4-5절 말씀을 떠올렸을 것이다.

 

BHS 6:4-5

`dx'(a, Ÿhw"ïhy> WnyheÞl{a/ hw"ïhy> lae_r"f.yI [m;Þv.

.`^d<)aom.-lk'b.W ^ßv.p.n:-lk'b.W ^ïb.b'l.-lk'B. ^yh,_l{a/ hw"åhy> taeÞ T'êb.h;a'äw

 

 

개역 신 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유대인들은 매일마다 이 말씀을 암송한데다가, 70인경을 성경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이들에게 “들으라”는 표현은 매우 익숙했다.

 

o` e;cwn w=ta avkou,ein avkoue,tw ( 있는 자는 들으라)

ΒΝΤ 8:8

a;koue Israhl (이스라엘아 들으라)

LXT 6:4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마치시고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을까?

 

이 비유에 따르면,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라야 백배의 결실을 맺는다(8).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곧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이다(15).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모두다 구원 받지는 않는다. 믿음은 실천하여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믿음이 무조건 구원의 조건이 되지 않는다. 믿었으나 배교한다면 구원 받지 못한다. 말씀을 인내로 실천하는 자가 구원 받는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비유를 가르치시고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심으로써, 마음(bb'l)을 다하고 성품(vp,n<)을 다하고 힘(daom)을 다하여 믿음을 실천함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강조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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