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제 설정(a setting of premise)은 연구의 시작부터 종료까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보통 연구자는 학계에서 통용되는 상식을 기반으로 전제를 설정하고, 개인의 목적에 부합한 연구를 진행한다. 연구 성과는 연구자의 목적이 얼마나 철저하게 검증되고 객관성을 유지하며, 학계 기여도를 따져 평가된다.
일정 부분에서는 전제가 연구의 방향성을 결정짓는다고 해도 무방하다. 문제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학계에서는 정설로 통하는 특정 가설을 검증하지 않고 연구를 진행할 때 그 방향성이 어긋나는 사례가 많다는 사실이다. 물론 연구자가 자신이 적용하는 전제를 일일이 다 검증할 수 없다. 내가 학습 시간에 비례해 성적을 못 내던 시절에는 저자의 진술을 다 따지고 들었다. 지금은 내가 검증할 수 있는 부분은 하고, 그렇지 못한 여분은 기존 견해를 따르는데, 이 정도만 해도 교수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내면에 개운치 못한 찝찝함이 자리 잡고 있다. 왜냐하면 학계에 시대정신이라고 해야 하나, 일종의 불문율로 여겨지는 그 무엇이 존재한다는 인상을 받기 때문이다. 그것도 내 입장에서 잘못된 가정으로 여겨지지만, 학계에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여겨지는 듯한 느낌말이다. 대표적으로 구약에서는 문서설이 그러하고, 요한복음 연구에서는 헬레니즘의 영향이 그러하다.
웨신 시절 유대주의를 강조하는 교수들로부터 사사를 받아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구약이나 신약을 읽을 때 고대 근동이나 헬레니즘의 영향을 인정하면서도 이스라엘의 특이점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공부할 때 특정 학자군에서 헬레니즘이나 기타 문화의 영향을 강조할 때마다 알레르기는 아니지만, 그 비슷한 껄끄러움을 느낀다. 생각해보면, 웨신에서 목회학 석사(MDiv) 졸업 논문으로 『삭개오 이야기 (눅 19:1–10)』, 신학 석사(ThM) 졸업 논문은 『요한계시록의 목자 모티프 ―스가랴 14장, 요한계시록 7:9-17, 21:1-8 상호본문성 연구―』를 썼으며, 칼빈신학교(Calvin Theological Seminary)에서 박사 과정 연구로 이어질 『Reading John 10:1–18 in Light of Zechariah 9–14』를 썼는데, 이 글 모두 구약과 신약의 연관성을 탐구하고 내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 유대주의가 아닌 타 문화의 영향을 강조하는 학자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릴 턱이 없다. 그들 입장에서는 그럴 만한 근거가 있다 하더라도, 내가 볼 때 객관적인 자료 분석에 근거한 결론이나 전제가 아니라 선입관이나 진영에 함몰된 일방적인 주장으로 여겨진다. 아마도 연구자들이 이런 의도치 않은 실수를 반복하는 이유는, 관점을 재정의해 줄 증거나 자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검토를 하지 않거나 자신의 전제를 의심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따름이다. 오랫동안 동일한 본문을 봐도 전제를 새롭게 하지 않으면, 결국 확증 편향적인 성향으로 연구에 임할 수밖에 없다. 나에게 가장 어려운 작업 중 하나는 내 기존 이해를 넘어서는 일이다. 내가 자료 조사와 분석에 수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행히 지금은 요한복음 연구에 새로운 문이 열렸다. 일부 학자들이 요한복음은 헬레니즘이 아니라 유대주의 안에서 읽어야 할 필요성을 자각하였다. 나는 박사 과정에서 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을 연구할 예정이다. 이 연구에서는 내 주제와 관련해 고대 근동부터, 구약, 제2성전기 문헌 등을 살펴봐야 한다. 아마도 여러 교수가 내 연구제안서에 호감을 표현한 이유가 현 학계의 추세에 부합한다고 판단해서가 아닐까 추측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