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예수께서는 첫 번째 유월절(2:13)과 세 번째 유월절(11:55)에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하지만 두 번째 유월절(6:4)에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는 기록이 없다. 이 시기에 예수께서 활동하신 무대는 갈릴리(6:1)와 가버나움(6:24)이다. 이후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시기는 초막절(7:2, 10)이다.

유월절은 순례 절기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두 번째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으셨으므로, 이 유월절은 연례 절기(annual feasts)가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Daise).

이 주장은 추후 검토하겠지만, 현재 내 질문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첫 번째, 왜 예수께서는 유월절에 갈릴리와 가버나움에 계셨나? 두 번째, 왜 예수께서는 유월절이 가까운 때에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쯤 되는 사람들을 먹이시는 이적을 베푸셨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예수의 가르침에서 얻을 수 있다(22-59절).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적의 배경인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1절)에 위치한 산(3절)은 광야를 연상시키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49절).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첫 번째 해답과 연관되어, 광야 시절 만나 사건과 대비하여 예수의 사역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있다(50-51절).

두 질문에 대한 해답은 다음과 같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유월절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예수께서는 유월절의 성취자로서 생명의 떡이 되신다. 그 성취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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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주인공인 에녹은 꿈을 통해 하늘의 계시를 전달받는다. 동물묵시록(1 Enoch 85–90) 에녹의 번째 꿈에 해당하며, 그는 자신이 내용을 아들 므두셀라에게 전한다 (85:1). 본문에서 에녹의 일생은 언급되지 않는다. 아담부터 셋의 계보(85:1–9) 노아 일대기의 시작(89:1) 사이에는 천사의 타락과 하늘의 심판(86:1–88:3) 다룬다. 에녹은 하늘의 심판에 관한 꿈에서 천사로부터 하늘로 들려 올려져 타락한 천사의 심판을 본다(87:2–88:3). 번째 심판의 대상은 타락한 천상적 존재이다(86:1–88:3). 타락한 천상적 존재는 지상 세계에 존재하는 악의 기원으로 간주된다.

노아의 가족은 모두 황소이다(89:1). 가족 구성원 가운데 노아만 비밀을 전수받으며, 그에게 비밀을 전수한 존재는 천사 명이다(89:1). 노아는 비밀을 듣고 두려움에 전율을 느낀다(89:1). 이어서 그는 황소로 태어났으나 사람이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89:1). 그는 자신을 위해 (편의상 앞으로 방주로 표기) 만들고 그의 가족이 안에 거한다(89:1). 홍수 심판은 지상적 존재를 대상으로 한다(89:2–8). 노아가 황소에서 사람이 되는 시점은 방주를 만들 당시로 보인다(cf. 89:1, 9).

에녹과 노아는 각각 천국의 계시와 비밀을 공유 받지만, 그들은 피심판자들에게 권면이나 회개를 선포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에녹은 하늘의 계시를 자신의 아들 므두셀라에게 가르쳐줄 뿐이다. 노아는 천사가 전해준 비밀을 통해 방주를 만들어서 그의 가족은 홍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지만, 비밀을 누구에게도 누설하지 않는다. 홍수 심판의 대상은 지상적 존재이다.

천상적 존재를 위한 일차 심판과 지상적 존재를 위한 이차 심판은 피할 없는 하늘의 뜻이다. 심판에 대한 에녹의 반응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에녹은 천상적 존재를 향한 일차 심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지상적 존재, 특히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심판에는 고통을 느낀다. 가령 에녹은 환상에서 하나님의 성전이 파괴당하고 (89:54)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세력으로부터 침략을 당하는 장면을 보고(89:55), 하나님께 구원을 간청한다(89:57).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침묵하신다(89:58). 하나님의 침묵은 심판의 필연성을 의미한다.

모세의 역할은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 유대 전통에서 모세는 선지자의 원형으로 간주된다. 모세의 선지자 직분에 관해서는 Wayne Meeks The Prophet-King: Moses Traditions and Johannine Christology (Leiden: Brill, 1967, 최근 복간본은 Eugene, OR: Wipf and Stock Publishers, 2017) 주요한 자료이다. 모세의 선지자 직분에 관해서는 예외적인 적용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가 유일무이하게 하나님을 대면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에녹1서는 이러한 관점을 수용하지 않는 듯하다. 양이 높은 바위의 꼭대기에 올라갔다가 다시 양떼로 돌아온다(89:29). 이후 줄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시내산 사건과 흐름이 비슷하다. 동물묵시록에서 주요 인물의 일생을 간략하게 진술하는 특징을 고려한다면, 하나님의 시내산 현현은 꽤나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89:29–35). 그러나 시내산 이야기에서 중요한 사건인 돌판 수령은 언급하지 않는다. 지점에서 Nickelsburg 양떼의 눈이 열리는 현상(89:28) 계시와 관련이 있고, 이와 반대로 눈멈(blindness) 배교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1 Enoch, 380–1). 주장에 관해서는 면밀한 관찰과 비평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차후에 다룰 예정이다. 내가 주목하는 특징은 에녹 1서에 모세의 돌판 수령에 관한 진술이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과 독대한 사건을 모세의 선지자 직분의 명분으로 삼는 전통은 차치하더라도, 고대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관련된 돌판 수령을 생략한 이유를 고민해 필요가 있다. 부분에서 에녹 1서가 율법주의(legalism) 주목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어쩌면 심판의 필연성은 율법 준수 여부와 무관하다고 믿어서 부분을 언급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모세에 관해서 언급해야 또다른 특징은 그는 양으로 묘사되지만, 후에 사람이 된다는 진술이다. 여기서 천상적 존재와 구별해야 한다. 천상적 존재는 사람의 형상(heaven [beings] with the appearance of white men, 87:2) 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 사람은 아니다.

엘리야(89:52) 대한 진술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선지자 전통을 중요시했던 고대 이스라엘의 통념과 달리 동물묵시록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선지자는 엘리야가 유일하다. 엘리야를 포함한 모든 선지자는 양으로 묘사되고, 그들의 사역은 실패로 끝난다(89:51–53). 다만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지만(89:51), 유일하게 엘리야는 건짐을 받고 하늘로 올림을 받는다(89:52). 엘리야에 관한 독특한 진술은 승천한 엘리야가 종말의 때에 하강한다는 기록이다(90:31). 하강하는 숫양의 정체에 관해서는 유다 마카비와 엘리야를 두고 논쟁이 있는데, 나는 엘리야가 적합하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Nickelsburg 지적한대로, 유다 마카비는 승천했다는 기록이 없다(1 Enoch, 405). 천상적 존재가 아닌 이상 지상적 존재는 승천이 선행되어야 하강이 가능하다. 이때 엘리야는 숫양으로 묘사된다. 엘리야는 지상에서 양으로 묘사되었다가 하강할 때에는 숫양으로 그려진다. 또한 에녹과 같이 하강하는 인물이라면, 유다 마카비가 아닌 엘리야가 개연성이 크다. 여기서 에녹과 엘리야의 공통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이에는 여러 차이점이 존재하지만, 승천을 경험한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지상에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승천이라는 경이로운 경험은 에녹 1서에서 에녹이 계시 수령자가 되는 근거이자, 엘리야가 최후의 날에 숫양으로 하강한다고 묘사되는 이유로 작용한다. 엘리야가 왕국 분열의 종말과 관련된 인물이라서 중요하게 서술되었다는 주장이 있음(Fröhlich, “Symbolical Language,” 630–631. Chae, Jesus as the Eschatological Davidic Shepherd, 99, n.19에서 재인용).

동물묵시록에서 모세의 돌판 수령과 엘리야를 포함한 선지자의 사역에 비중을 두지 않는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종말의 때에 닥칠 이스라엘의 멸망과 회복은 하나님의 뜻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율법과 예언을 준수한다고 해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바뀌지 않는다. 실제 역사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율법과 예언을 준수한 시기보다 배역한 기간이 길다. 이러한 믿음이 모세와 선지자에 관한 진술에 묻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정리하자면, 에녹 1서는 율법과 예언의 중요성보다는 종말론적 심판과 구원의 현실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에녹 1서의 결정론적 관점은 ”(90:17) 존재에서 드러난다. 동물묵시록에서 심판이 실행될 책이 언급되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특징에는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해석하는 에녹 1서의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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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메시아에 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모세를 이상적인 지도자로 그리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필로의 저술을 바탕으로 표면적인 해석을 수용하지 않고, 로마 제국의 통치라는 그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노출되지 않은 이면의 의도를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들에 따르면, 필로는 메시아라는 정치적 논란을 야기할 수 있는 단어를 사용하는 대신에 지도자의 덕목을 다루면서 모세를 이상적인 메시아로 제시했다. 만약 이들의 주장이 옳다면, 필로가 다윗을 언급하지 않은 이유가 설명된다.

요한복음에서 모세는 아주 중요한 위치를 갖는다. 특히 율법의 수여자로서 유대인이 예수를 정죄하는 결정적인 기준이 된다. 유대인 집단과 갈등이 증폭되지만, 동시에 예수를 선지자이자 메시아로 고백하는 개인과 집단도 커져간다. 메시아사상을 관점으로 요한복음을 보면, 12장은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 계열의 구원자 사상(Davidic Messianism)을 믿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에서 목자-왕 전승 역시 그 증거가 된다. 그러나 요한은 끝끝내 다윗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 나는 이러한 의도가 메시아사상의 반작용을 고려했다고 짐작하고 있으며, 내가 풀어야 할 과제 중 하나이다.

오늘 필로의 메시아 사상에 관한 논증을 통해서, 내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찾은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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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푸스는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 이후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 하나님에 관해 기록한다. 왕이 이스라엘을 이끄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이 선택한 지도자를 통해 친히 개입하신다. 모세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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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J. Hafemann, 'Moses in the Apocrypha and Pseudepigrapha: A Survey', JSP 7 (1990), 77-104.

journals.sagepub.com/doi/pdf/10.1177/09518207900000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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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장은 예수의 정체성과 사역을 설명한다. 요한은 자신의 독특한 어휘를 사용해 예수의 성육신, 십자가와 부활을 설명하는데, 그 목적은 "예수는 메시야시다"라고 선포하는 데 있다. 3-4장은 유대인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 이스라엘 전체를 포괄하려는 의도로 읽을 수 있다.

5장은 갈등 국면으로 접어든다. 예수께서 베데스다에서 행한 이적이 그를 적대하는 무리가 등장하게 된 계기가 된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5:16)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과감하게 드러내신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5:17)


예수님의 반응은 유대인에게 극단의 적대감을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된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5:18)


분명 유대인은 모세의 율법에 충실하려는 선한 의도가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행위가 모세의 가르침에 부합하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5:45)


예수께서는 모세 율법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유대인들에게 모세가 너희를 하나님께 고발한다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선포는 요한복음의 전개, 그리고 예수를 향한 유대인의 적대감만큼이나 극적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진정한 모세의 후계자라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5:46)


요한은 유대인들이 직면한 믿음의 장벽을 서술하고 있다. 요한 공동체와 오늘날 신앙 공동체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믿는다. 하지만 예수 생존 당시나 지금이나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거부하는 자들이 있다. 더구나 본문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은 예수의 구속 사역을 경험하기 전이다. 

청중/독자는 이러한 전개에 당황할 수 있으나, 이러한 반전은 필연적이다. 세례 요한과 예수의 선포가 실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1: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19)


예수와 유대인의 갈등은 예수의 고난을 위한 필연적인 장치이다. 유대인의 적대감은 예수의 죽음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그의 부활을 위한 필연적인 선행 과정이므로, 요한은 갈등을 자신의 고유한 수사적 기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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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구원자(messiah)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등장하기 이전에, 이스라엘의 구원자 사상을 형성하는데 기여한 인물들을 꼽으라면, 나는 모세, 다윗, 마카비를 꼽을 듯 하다


모세는 출애굽부터 가나안 장착 이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던 전천후 지도자였다. 출애굽 사건은 제국의 억압에서 풀려나 이스라엘 부족의 회복을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다윗은 사실 이스라엘 국가의 두 번째 왕이지만, 사울의 실책과 다윗의 성공적 통치로 인해 이스라엘 역사에서 최초이자 이상적인 왕으로 기억된다.


마카비는 마카비 혁명 이후 유대 지역에 하모스모니안 왕조를 세운 마지막 왕조이다. 마카비서는 외경으로 분류되어, 개신교인들은 접할 기회가 거의 없지만, 몇몇 신약 본문에서 마카비 혁명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공통점은 모두 제국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켰다는데 있다.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불렀을 때 그들은 당연히 이 세 사람들처럼 로마 제국의 압제에서 구원해줄 군사적 메시아를 기대했다.


당분간 나의 관심사는 다윗에게 집중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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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1

말씀묵상 2011. 9. 21. 18:18

[매일성경] 사도행전 15:12-21

#1
예수를 믿지만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이방인에게 강조한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부활사건, 오순절성령강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체 그릇된 지식과 열심으로 자신의 관습을 다른 사람들을 강요한다. 진정한 믿음은 무엇인가?

#2
초대교회는 새로운 시대를 접하고 있지만 각 성의 회당에서는 모세를 가르치고 있었다. 따라서 이방인의 선교확장으로 인해 선지식과 새로운 지식의 차이로 인해 갈등을 빚을 가능성이 컸다. 지금 내 지식은 새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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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31

말씀묵상 2011. 8. 31. 07:20
[매일성경] 사도행전 7:37-53

#1
이스라엘 백성은 지도자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간 이후 오랫동안 보이지 않자 이스라엘로 돌아가려고 했고 우상숭배를 했다. 신앙의 지도자가 없으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가? 왜 하나님과 일대일로 교제하지 않는가?

#2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성전을 짓고자 했지만, 하나님을 성전에 담아낼 수 없는 분이시다. 또한 성전에서만 예배해야 할 대상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서든 예배 받아 마땅하시다. 성전 중심의 사고를 버려라.

#3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의 삶이 불순종의 역사로 규정한다.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지만, 그들은 불순종의 삶을 살았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과연 순종의 삶을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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