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용두사미?

끄적 2024. 1. 19. 05:12

페이스북이 내 관심을 끌 만한 소재로 개인과 단체 포스팅, 광고 등을 막 뿌려대는데, 그중 가장 자주 접하는 주제가 박사 학위 논문에 관한 것이다. 가령 말을 그리는데 꼬리와 뒷다리 등 뒷부분은 섬세하게 그리지만 앞부분은 아기가 그린 듯한 그림으로 완성된다는 식이다.

현재 박사 과정을 진행하면서 느끼지만, 박사 과정은 그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많은 박사 과정 학생이 논문 작성으로 고생하고 좌절할 수 있지만, 학위 논문은 그런 식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논문 전체의 질적 균일성을 논하는 거라면, 편차가 존재할 수 없다고 인정하겠으나, 하향곡선에 자리한 지점은 해당 논문의 주요 논지가 아닐 가능성이 높아서 저자의 기여도를 평가절하하는 요소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상향곡선이야말로 저자의 진정한 관심사이자 기여도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박사 과정 학생이 꾸준한 성과를 내지 못하는 이유는, 혹은 학위 논문을 완성하지 못하는 이유는, 논문을 완성할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내가 재학 중인 UStA를 기준으로 석사 졸업 논문이 보통 1만 글자 정도라면 박사 학위 논문은 6-8만 글자를 요구한다. 글자 수로만 비교하면 6~8배 정도 격차가 있다. 석사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칠 역량은 있다고 검증되었지만, 박사 과정 진학을 위한 연구 제안서에서 학위 과정을 진행할 만한 역량이 있다고 판단을 받았지만, 결국  학위 논문을 완성할 만큼은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

나는 박사 과정을 시작한 이후 줄곧 지도 교수와 협의하면서 매 단계를 진행하고 있다. 중간중간 지도 교수가 여러 의견을 제시하지만, 결국 수용과 반려를 결정하는 건 내 몫이다. 달리 말하면, 당사자가 지도 교수(진)에게 끌려다녀서는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모든 책임은 최종적으로 학생이 짊어지기 때문이다.

학생 자신이 연구 제안서를 토대로 학위 논문을 완성해 낼 수 없다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고 결론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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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에서 목자-양 유비는 1권과 4권, 이렇게 단 두 곳에서 나타난다.

1권에서 트라시마코스는 소크라테스를 정의와 불의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비난하기 위해 "양과 목자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비난한다. 그에게 목자가 양을 돌보는 이유는 양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이며,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기술과 보수 사이의 상관관계를 통해 목자가 양을 돌보는 이유는 개인의 이득을 위해서가 아니며 양을 위한 것이라고 반박한다. 여기서 목자-양의 관계가 통치자와 피통치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는 특징이 발견된다.

4권에서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목자를 언급하지만, 이곳에서는 목자-양 유비가 아니라 목자와 개의 관계를 사용한다. 소크라테스에게 불의한 일에 대해 목자가 개를 부르는 것은 이성적 추론을 통한 통치를 의미하며, 개가 목자에게 복종하는 것은 국가의 보조자들이 통치자에게 복종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목자와 개는 통치 개념이 적용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플라톤의 『국가』에서 목자-양 유비는, 목자와 개의 관계를 활용한다는 측면에서 다소 변형이 있으나, 통치자와 피통치자에게 적용한다는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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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제일 관심은 국가 운영으로 보인다. 

『미노스』는 그리스에 영향을 미친 고대법(the ancient law)을 통해 전설의 크레타의 왕인 미노스를 등장시킨다. 소크라테스는 미노스를 이상적인 왕으로 칭하며,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찬가를 그 근거로 내세운다. 소크라테스가 미노스를 칭송하는 이유는 크레타 백성은 법을 준수하는 모범으로 알려졌으며, 법의 준수가 가능한 원동력은 고대 법이었고, 그 법을 통치 수단으로 입법화한 인물은 미노스였다. 다만 이 책은 영혼을 위한 배분으로써 법의 실재를 다루려는 시점에서 갑작스러운 끝맺음을 낸다. 내 짐작에 이런 결말은 저작 당시에 미완성된 저자의 사상에서 비롯되었거나, 자신의 다른 저작 『법률』에서 강화하려는 의도이거나, 한때 제기된 위작론을 고려하여 위작의 한계로 인해 플라톤의 경험과 사상을 오롯이 담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국가』의 화두는 '정의란 무엇인가?'이다. 소크라테스의 대담자들은 저마다의 정의에 관한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대화를 통해 소크라테스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각자가 자기 일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 정리한다. 그에게 정의는 국가와 개인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본서에서 통치자로 철학자를 지명한다.

『정치가』는 국가 운영의 실체로서 정치가를 지목한다. 본서에서 정치가는 입법이라는 국가 운영의 실체를 감당하며, 시민이 주도적으로 법이 현실에서 작동하도록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세간에 『국가』가 플라톤의 주저라고 하는데, 내가 볼 때 플라톤의 정치 혹은 법에 관한 정점은 『정치가』에서 나타난다. 이 생각은 『법률』이나 다른 저작을 통해 바뀔 수 있음. 플라톤의 저작에서 흥미로운 지점들이 적지 않지만, 내 주요 관심사는 아니라서 필요만 충족하는 선에서 매듭지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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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에서 목자-양 유비가 나타나는 본문 중 하나는 소크라테스와 트라시마코스의 대화이다. 이 논쟁의 화두는 "정의란 무엇인가?"이다. 트라시마코스느 "정의는 강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소크라테스는 "전문지식은 강자가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살피거나 명령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다스리는 약자에게 이로운 것을 살피거나 명령한다"는 말로 반박한다.

자신의 주장이 전복된 상황에서 트라시마코스는 양과 목자를 언급하며, 목자가 양을 목양하는 이유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양 치는 기술은 그 대상인 양에게 가장 좋은 것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플라톤의 저작을 읽으며 느껴지는 몇 가지 감정들이 있는데, 이 글에서 다루는 부분에 한정하면, 내가 볼 때 소크라테스는 권력의 속성을 모르거나 외면하고 있다. 그는 그저 현실감각이 뒤처지는 논리 이상주의자라는 인상을 준다.

내 역할은 일차적으로 이 대화에 나타난 목자-양 유비의 특징을 분석하는 것이고, 이차적으로 그리스-로마 문헌에 나타난 플라톤의 저작이 가진 특징을 서술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유대 문헌과 비교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굳이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을 필요 이상으로 비판할 필요가 없으니, 이 정도만 언급하고 내 할 일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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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플라톤의 『국가』에 사용된 두 번의 용례를 분석하고, 다음 주부터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읽어야 한다. 호메로스의 두 작품에 사용된 용례가 대략 63회 정도로 파악되는데, 그 압도적인 숫자만큼이나 저자가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목자-양 유비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 용례 분석에 신중을 더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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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미노스』에는 목자가 두 번 나타난다. 첫 번째 용례는, 소크라테스가 이상적인 왕으로 미노스를 칭송하는 이유 중 하나로 호메로스가 훌륭한 장군을 "양 떼의 목자"라고 부른 용례를 제시한다. 두 번째 용례는, 배분자 혹은 적임자의 사례 중 하나로 목자를 언급한다. 양 떼를 가장 잘 양육하는 사람은 목자이다. 이어 소크라테스는 사람의 영혼을 위한 법은 왕이 적임자라고 말한다. 두 용례 모두 목자-양 유비를 왕 혹은 지도자와 연결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이 저작에서 목자-양 유비를 예시로 사용되었을 뿐 그 이상의 기능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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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내가 살펴본 플라톤의 『정치가』와 『미노스』를 미루어 보아, 플라톤의 주요 관심사는 국가 운영이며, 법은 국가 운영을 위한 도구이다. 플라톤은 국가 운영의 조타로서 법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으며, 그 결과로 법률 3부작으로 꼽히는 『미노스』(Minos: On the Laws), 『법률』(The Laws), 『에피노미스』(Epinomis: On the Laws)가 탄생했다. 학계에서는 오랫동안 『미노스』와 『에피노미스』를 위작으로 간주했으나, 지금은 진작론이 대세라고 한다.

플라톤의 저작 여부와 저작 시기는 내 관심사가 아니지만, 플라톤의 저작이라는 전제하에서는 『미노스』가 초기 작품에 『정치가』가 중후기 작품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결정적인 증거라면, 국가 운영의 도구로서 법에 대한 구체화가 『미노스』보다는 『정치가』에서 개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미노스』가 영혼을 위한 배분에 관해 본격적인 논의를 하기 전에 매듭을 짓지만 『정치가』는 더 다양한 예들을 통해 논의를 완성해 간다.

두 작품 사이에는 몇 가지 차이가 보이는데, 그중 하나는 왕에 대한 묘사이다. 『미노스』에서는 크레타 왕 미노스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며 고대법의 가치를 강조하지만, 『정치가』에서는 왕의 역할을 미비하게 간주하며 법 제정자로서 정치가의 역할을 강조한다. 플라톤의 시대 상황을 고려한다면, 『미노스』보다는 『정치가』가 저자의 현실을 더 잘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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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정치가』에서 크로노스 신화는 시대의 전환과 그에 준하여 인간이 현실에 적응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목적을 가진다. 크로노스 시대에 짐승과 인간은 신성한 목자, 즉 신의 돌봄을 받았다. (뒤집어 말하면, 인간이 지성을 활용할 만큼 발전된 사회가 아니었다는 의미가 내포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현 제우스 시대는 분열의 시기로 이전과 달리 신을 의지하지 말고 인간이 신이 준 지성으로 살아가야 한다.

반면, 『미노스』에서 크로노스는 신화에 알려진 대로 그의 포악성을 통해 법의 상대성을 지적하는 목적을 가진다. 작품에서 동료는 소크라테스에게 국가마다 다른 법을 갖고 있다고 항변한다.

두 작품 모두 크로노스를 제우스와 대비된 인물로 묘사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만약 『정치가』에서 크로노스 시대를 이상향으로 그리지 않고, 반어적으로 읽어야 한다면 두 작품 모두 크로노스를 부정적으로 묘사한다는 공통점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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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제출한 JSEC (Seminar on the use of Jewish Scriptures in Earliest Christianity [formerly the use of the OT in the NT]) 발표 제안서가 수락되었습니다.

최대 2편의 발표할 수 있을 줄 알고 3편의 제안서를 보냈으나, 관행상 발표자당 1편만 허용이 된다고 응답을 받았고, 결과적으로 담당자들이 세미나에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한 "Rethinking the Origins of John 7:37-39"가 발표 주제로 선정되었네요. 나머지 2편은 다른 세미나에 제출해야겠습니다.

세미나는 3월 21일(목)~23일(토)에 Queen's Foundation, Birmingham에서 열립니다. 세미나 발표를 기회로 버밍엄 여행을 해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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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학계의 경향대로 『정치가』와 『미노스』가 플라톤의 저작이라고 전제하면, 두 작품에 존재하는 저자의 제우스에 관한 독특한 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역서의 해설에 따르면, 『미노스』는 한때 위작론이 대세였고, 지금은 진작론을 의심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먼저 『정치가』에서 제우스는 크로노스 신화에서, 크로노스 시대와 대비되는 현시대의 상징, 즉 플라톤이 처한 현실을 제우스의 유산으로 정의한다. 크로노스 시대에는 인간이 신성한 목자의 목양에 의존하면 되었으나, 제우스 시대에는 인간 스스로 지식/기술을 사용하여 생존해야 한다.

이어 『미노스』의 등장인물인 소크라테스는 크레타의 왕 미노스는 이상적인 왕으로 묘사한다. 미노스는 왕의 기술을 습득한 자로, 제우스와 긴밀한 관계를 맺은 유일한 왕이었다. 미노스를 향한 찬사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저작에 잘 나타난다.

결국, 플라톤은 제우스 시대의 대표적인 특징을 기술로 정의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비록 두 저작에서 국가 운영의 주체로서 왕과 정치가의 입장을 달리 강조한다는 차이가 있으나, 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공통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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