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메시아에 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모세를 이상적인 지도자로 그리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필로의 저술을 바탕으로 표면적인 해석을 수용하지 않고, 로마 제국의 통치라는 그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노출되지 않은 이면의 의도를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들에 따르면, 필로는 메시아라는 정치적 논란을 야기할 수 있는 단어를 사용하는 대신에 지도자의 덕목을 다루면서 모세를 이상적인 메시아로 제시했다. 만약 이들의 주장이 옳다면, 필로가 다윗을 언급하지 않은 이유가 설명된다.

요한복음에서 모세는 아주 중요한 위치를 갖는다. 특히 율법의 수여자로서 유대인이 예수를 정죄하는 결정적인 기준이 된다. 유대인 집단과 갈등이 증폭되지만, 동시에 예수를 선지자이자 메시아로 고백하는 개인과 집단도 커져간다. 메시아사상을 관점으로 요한복음을 보면, 12장은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 계열의 구원자 사상(Davidic Messianism)을 믿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에서 목자-왕 전승 역시 그 증거가 된다. 그러나 요한은 끝끝내 다윗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 나는 이러한 의도가 메시아사상의 반작용을 고려했다고 짐작하고 있으며, 내가 풀어야 할 과제 중 하나이다.

오늘 필로의 메시아 사상에 관한 논증을 통해서, 내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찾은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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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ph Klausner는 메시아 칭호에 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유대 문헌에서 셀류키드 제국에 맞서 하스모니안 왕조로 일컬어지는 유대 왕국을 재건한 Judah Maccabee는 메시아로 지칭되지 않지만, 로마 제국에 맞섰으나 실패한 지도자 Shimon bar Kosiba는 메시아로 불리는 이유에 관한 것이다.

Matthew V. Novenson은 이 질문에 답하고자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 선지서부터 랍비 문헌에 언급된 몇몇 인물을 소개한다. 그리고 그는 Morton Smith의 글을 인용해 메시아 칭호는 특정 인물의 업적에 관한 동시대 사람의 반응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메시아의 등장에 관한 예언을 토대로 다윗 계열의 메시야(Davidic Messianism)와 같은 유대 사회 내 일종의 메시아를 선별하는 기준이 있었다. 첫 번째 기준은 다윗 가문의 후손이어야 하고, 두 번째 기준은 업적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동시대 사람들이 특정 인물을 메시아로 인식했느냐 아니냐로 갈린다. Klausner가 의문을 제기한 Judah Maccabee와 Shimon bar Kosiba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메시아의 조건

Marvin A. Sweeney는 『예언서』(대한기독교서회)에서 예언자들이 선포한 회복될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다윗 계열의 메시아라고 주장한다. 메시아의 조건으로 다윗 혈통을 강조한 이유는 다윗 언약(삼하 7:8-16)에서 정당성을 찾을 수 있다. 역사적으로 다윗은 이상적인 왕으로 기억된다. 따라서 종말적인 왕의 등장을 고대하는 유대인에게 이상향은 혈통으로는 다윗 가문이고, 업적과 행실은 다윗과 같은 왕이어야 한다.

견고한 신념과 달리 다윗 계열의 메시아에 관해서는 의구심이 있다. 특히 예언서에서 메시아의 등장에 관한 본문을 분석해 보면, 종말론적 구원을 성취하는 왕에 대한 묘사에서 특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내 관찰은 목자-왕 전승에 관한 본문 연구를 토대로 하고 있다. 대다수는 다윗 혈통의 메시아를 공표하지만, 몇몇 예언자들은 다윗과 같은 왕이 등장한다고 선포하여 다윗 가문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영토 회복과 성전 재건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더구나 후자의 경우 다윗이라는 특정 인물보다는 종말론적 구원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왕되심을 선포하는 경향이 있다.

메시아의 조건에서 업적과 행실에 관한 이견은 없다. 다윗과 같은 목자가 이스라엘 영토 회복과 성전 재건을 이루는 날을 종말론적 구원으로 그린다. 헤롯 대왕이 메시아로 불리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메시아의 조건은 확실히 영토 회복과 성전 재건이다. 영토 회복은 하스모니안 왕조를 적대했다는 측면에서 이견이 있을 수 있고, 헤롯의 혈통적 정당성은 확보하지 못하지만, 자신의 성과를 과시하고자 성전 공사를 강행한 헤롯의 야망은 성공적이었다. 이 부분에서 이스라엘 역사상 두 번째로 독립국가를 이루한 Judah Maccabee가 메시아로 인식되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결론적으로 메시아의 조건은 이스라엘 영토 회복과 성전 재건이며, 더 중요한 변수는 동시대 사람들의 평가라고 할 수 있다.

메시아 예수

공관복음에서 예수의 다윗 혈통을 강조한 이유는 예수의 메시아됨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메시아가 다윗 혈통이어야 한다는 신념에 균열을 내신다. 전문 용어로는 Davidssohnfrage("the messiah cannot be the son of David")이라고 한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예수의 업적은 메시아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 특히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역사상 유례가 없을 뿐 아니라 메시아 공식과 동떨어져 있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군중의 반응은 그들이 군사적 메시아를 고대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족보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대뜸 요한은 예수의 기원이 하늘이라고 선포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로고스라는 개념을 통해서 말이다. 또한 2장에 성전 정화 사건을 배치해 성전되시는 예수를 강조한다.

믿음의 고백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역사와 예언자들의 선포를 통해 메시아관을 정립했다. 그들의 기준에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한다. 지상적 영토와 성전을 갈망하는 유대인과 달리,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나라와 하늘 성전을 고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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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공동체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국가법이 유일무이한 효력을 갖는 경우가 많지만, 고대 사회에서는 종교법 또한 지대한 효력을 가졌다. 

고대 이스라엘은 사사 통치 시대에서 왕권 국가로 전환된 이후에도 (형식상으로라도) 율법이 최상위 권위를 가졌다. 신명기 사관으로 집약되는 유대인 사고는 이스라엘 왕국 멸망과 포로 귀환을 거치며 율법 준수에 관한 집착으로 귀결되었다. 에스라서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하스모니안 왕조 등장 이후 헬레니즘화된 개혁이 실시되면서도 율법 준수라는 기조는 유지된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이 율법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율법 준수를 강조하는 동시에 언약을 선포한 선지자들이 있다. 이스라엘 국가의 멸망과 유대 사상의 종말이라는 위기에서 이스라엘 회복과 갱신은 율법 준수가 아닌 언약으로 가능하다고 선포한다.

인간의 책임으로써 율법 준수는 매우 중요한 행동 강령이지만, 인간은 필연적으로 부패하고 그 결과 심판을 받는다. 그러나 끝이 아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새로운 시작을 가능케 한다. 

예수 생애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과 언약 사이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율법 준수를 통한 거룩한 이스라엘을 꿈꾸었고, 그러한 이유에서 규례를 어기는 자들을 정죄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대인들은 안식일 규범을 어기고 신성모독을 한 예수는 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cf. 요 5:18).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 오늘날 종교중독이라고 부르는 율법주의적 열심이나 신앙적 해이에 빠지는 이유가 바로 율법과 언약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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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푸스는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 이후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 하나님에 관해 기록한다. 왕이 이스라엘을 이끄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이 선택한 지도자를 통해 친히 개입하신다. 모세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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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언약  (0) 2021.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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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장은 예수의 정체성과 사역을 설명한다. 요한은 자신의 독특한 어휘를 사용해 예수의 성육신, 십자가와 부활을 설명하는데, 그 목적은 "예수는 메시야시다"라고 선포하는 데 있다. 3-4장은 유대인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 이스라엘 전체를 포괄하려는 의도로 읽을 수 있다.

5장은 갈등 국면으로 접어든다. 예수께서 베데스다에서 행한 이적이 그를 적대하는 무리가 등장하게 된 계기가 된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5:16)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과감하게 드러내신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5:17)


예수님의 반응은 유대인에게 극단의 적대감을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된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5:18)


분명 유대인은 모세의 율법에 충실하려는 선한 의도가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행위가 모세의 가르침에 부합하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5:45)


예수께서는 모세 율법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유대인들에게 모세가 너희를 하나님께 고발한다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선포는 요한복음의 전개, 그리고 예수를 향한 유대인의 적대감만큼이나 극적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진정한 모세의 후계자라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5:46)


요한은 유대인들이 직면한 믿음의 장벽을 서술하고 있다. 요한 공동체와 오늘날 신앙 공동체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믿는다. 하지만 예수 생존 당시나 지금이나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거부하는 자들이 있다. 더구나 본문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은 예수의 구속 사역을 경험하기 전이다. 

청중/독자는 이러한 전개에 당황할 수 있으나, 이러한 반전은 필연적이다. 세례 요한과 예수의 선포가 실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1: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19)


예수와 유대인의 갈등은 예수의 고난을 위한 필연적인 장치이다. 유대인의 적대감은 예수의 죽음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그의 부활을 위한 필연적인 선행 과정이므로, 요한은 갈등을 자신의 고유한 수사적 기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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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저자의 고뇌는 유대주의의 연속성과 성전의 비연속성을 극복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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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기자는 자신의 목적의식을 명확하게 밝힌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0:31)

그러나 이 구절만으로는 요한복음의 저술 시기나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는 데 제약이 따른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J. 루이스 마틴(J. Louis Martyn)의 『요한복음의 역사와 신학』(류호성 역, CLC)이 탁월하다. 우리는 여전히 요한복음의 저술 시기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회당 축출 사건과 성전 파괴(AD 70)가 주요 저술 동기라는 사실은 명확해 보인다. 

유대인에게 성전은 민족적 정체성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공관복음서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성전 파괴 이후 새로운 복음서를 기술할 필요성을 느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러한 전제에 동의한다면, 요한복음이 성전을 강조하는 이유가 설명된다. 이러한 의도가 1~2장에서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장에 등장하는 로고스(1-18절)는 성육신을 위한 소재일 뿐 요한이 헬레니즘에 더 익숙하다는 증거는 아니다. 세례 요한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29)는 말은 예수의 사역을 선포하는 기능을 하며, 속죄제에 익숙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2장의 성전 파괴에 관한 말씀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한다. 요한이 1~2장에서 사용하는 개념은 오늘날 신자에게 덜 익숙하지만, 유대인에게는 매우 익숙한 개념을 사용하여 예수의 사역을 설명한다. 이것을 우리가 통용하는 단어로 말하면,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이다. 더 나아가 요한은 이 세 개념을 모두 성전과 연결짓고 있다. 이러한 독법은 성전 파괴(AD 70)라는 시대적 상황과 잘 맞아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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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에 모세 전승이 나온다는 견해는 검증이 어렵지 않아 보인다. 반면 1장에 다윗 기독론이 묘사되어 있다는 주장은 세밀한 검증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요한복음 1장에서 모세 전승과 다윗 전승이 나타난다는 주장은 흥미롭다. 지금은 차후 연구를 위해 관련 글을 남겨 두는 선에서 만족해야겠다.

요한복음 1장과 모세 기독론
요한복음 1장과 다윗 기독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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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4를 모세의 시내산 사건과 연결 짓는 해석이 있다. 이에 대해 Craig S. Keener는 요한이 "현현의 언어"(the language of theophany)를 사용했다고 서술한다(17쪽). 그는 요한이 모세가 경험한 시내산 현현 사건과 예수의 성육신을 평행 시켜,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도록 의도한다고 진술한다(20쪽, 자세한 내용은 23―25쪽을 보라). 이러한 의도는 요한이 예수를 모세를 능가하는 분으로 묘사하려는 데 있다(21―25쪽).

 

더 자세한 내용은 중요한 내용이라 적절한 시기에 다루려고 한다.

 

참고 자료

Keener, Craig S. "We Behold His Glory!" (John 1:14). In John, Jesus, and History, Vol. 2: Aspects of Historicity in the Fourth Gospel. Paul N. Anderson, Felix Just, S.J., and Tom Thatcher eds. (Atlanta, GA: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2009),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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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마다 조금씩 견해가 다르지만, 대체로 이사야서의 저자를 이사야, 제2이사야, 제3이사야와 구별한다. 보통 제2이사야와 제3이사야를 후대 편집자로 부르는 데, 내가 볼 때 계승자라는 용어가 더 적합해 보인다.

 

제2이사야로 일컬어지는 무명의 예언자가 있었다고 전제하자. 전쟁처럼 국가적 위기의 시대에 예언자 집단이 평상시보다 더 활발하게 활동하는 현상을 고려한다면, 제2이사야가 생존하던 시대에 이사야 이외에 다른 예언자들의 예언이 퍼져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내 질문은 이렇다. 제2이사야는 왜 하필 이사야의 예언을 계승했을까? 달리 말해, 이사야의 예언 이외에 다른 예언은 사장된 이유가 무엇인가?

 

예언서를 공부하다 보니 자연스레 내가 포로기 신학과 묵시문학에 관심을 갖는 이유에 관한 답이 서서히 윤곽이 그려진다. 평상시라면 글이 써지는 대로 내버려 두었을 텐데,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어서 아이디어만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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