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내 박사 학위 연구 본문은 요한복음 10장 선한 목자 담론이다. 나는 세 가지 질문을 던지는데, 이미 두 질문에 대한 잠정적인 결론은 나온 상황이다. 박사 과정에서는 두 질문에 관한 잠정적인 결론을 보강하고, 나머지 한 질문에 집중해 답하면 된다. 내가 붙들어야 할 질문은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을 가르쳤을 때, 그가 떠올린 밑그림은 무엇이었을까?'이다. 수많은 선행연구에서는 이사야 53장을 지목한다. 소수는 스가랴 13장 7절이다. 지난 글에서 나는 소수 입장에 무게를 두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요한복음 10장에 나타난 예수의 죽음에 관한 가르침의 기원, 이사야 53장과 대안

요한복음 10장에 나타난 예수의 죽음에 관한 가르침의 기원, 이사야 53장과 대안

 

 

앞서 논쟁을 풀 방안을 발견한 듯한 감이 돈다고 적었다. 하지만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그중 하나가 바로 12장에 나오는 예수의 죽음에 관한 가르침이다.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요 12:34)

 

여기에서도 이사야 53장을 지지하는 견해가 압도적이다. 나 역시 예수의 죽음에 관해서는 이사야 53장이 지배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의 죽음을 스가랴 13장 7절로 설명할 수 있다면, 요한복음 12장에서 다시한번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을 설파하셨을 때 스가랴 13장 7절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요 12:41)

 

하지만 위 본문은 이러한 가능성을 배제한다. 이 구절에서 나는 다시 한번 가슴이 막히는 느낌이 든다. 대세를 따라 10장과 12장은 이사야 53장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면 된다. 이 지점에서는 내 기여가 없더라도, 이미 다른 두 질문에 대한 해답에서 학계에 기여하는 부분이 있어서 나로서는 이 부분에서 무리하게 모험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10장에서 스가랴 13장 7절이 배경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싹을 틔우는 중이다. 이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를 제시하려면, 수많은 자료를 분석하고 대세를 압도할 만한 강력한 논증을 내세워야 한다. 사실 이 과제만 해결해도 박사 학위 논문으로 손색이 없다. 어렵게 난관을 헤쳐나가도 12장에서 더 큰 장벽을 만난다. 인용 공식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요한복음에서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한다고 밝힌다.

 

답이 없지는 않다. 이사야를 대표적인 인물로 해석하면 된다. 간혹 신약 저자가 구약 본문을 인용할 때, 특히 선지자의 경우 동일한 메시지를 선포한 선지자 중 대표적인 인물을 내세우거나 전혀 관련 없는 인물을 내세우는 사례가 있다. 내 연구에 적용한다면, 이사야가 동일한 메시지를 선포한 인물 중 대표로 꼽혔다고 주장하면 된다. 실제로 이 주장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어차피 이 지점에 대한 답변은 이사야와 스가랴의 관계에서 규명해야 한다.

 

내 앞에 끝을 알 수 없는 장벽이 서 있는 기분이 든다. 박사 과정 시작 이전에 내 연구가 상당히 진척되어 있지만,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고비가 그만큼 많다. 엄밀히 말해 요한복음 12장은 내가 고민해야 할 본문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 요한복음을 계속 연구할 예정이고, 한편으로는 내가 가정하고 있는 신약의 구약 사용에 대한 전제를 시험하고 싶다.

 

신약의 구약 사용에 있어서, 나는 신약 저자가 구약을 구절 단위로 인용하지 않고 특정 본문을 밑그림으로 두고 그 위에 저자의 메시지를 얹힌다고 전제하고 있다. 구약의 밑그림과 신약 저자의 덧칠은 정교한 한 폭의 그림이 된다. 해석자로서 신약 저자의 구약 사용을 분석하다 보면, 구약 본문의 메시지에 저자의 섬세한 각색이 더해져서 글로 표현하기 힘든 벅찬 감동을 준다.

 

요한복음 10장과 12장은 내 전제를 실험하기 좋은 본문이다. 박사 학위를 빨리 끝내고 싶다는 현실적인 고민으로 크나큰 부담으로 느껴지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해석자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사명감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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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마찬가지지만 정보 전달자의 존재를 망각하는 실수를 자주 범한다. 사건의 본질은 그 자체가 아닌 그에 관한 해석이 규정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가장 근접한 예로는 언론사를 들 수 있겠다.

오늘날 수많은 독자가 성경을 읽을 때 기록자 혹은 편집자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으로 인해, 원저자(혹은 발화자)로부터 현 성경의 형태를 갖추기까지 편집 과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 역시 후대 편집 이론에 호의적이지는 않지만, 그 과정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아마도 성경 편집자는 서기관이란 집단으로 추정되는 모양이다. 편집자의 역할은 현대 독자가 상상하는 역할을 넘어서는 모양이다. 고대 편집자들은 해석자의 역할을 담당했었고, 차후에는 창작자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학계에서 신명기사관은 일종의 암묵적 동의로 전제하고 있는 가설로 보인다. 토마스 C. 뢰머(Thomas c. Römer)는 『신명기역사서 연구』에서 신명기사가로 서기관을 지목한다. 왕궁 역사 기록자라는 신분과 글과 작문이 가능한 신분을 고려한 추론이다. 성경에서 중요한 장르 중 하나인 묵시문학의 창시자에 관한 논쟁이 있다. 리처드 호슬리(Richard A. Horsley)는 『서기관들의 반란』의 기원으로 서기관을 지목한다. 이 글에서는 두 저자의 주장이 무엇인지 그 근거가 타당한지 따질 의향이 없다. 다만 둘 다 서기관을 배후로 주목했다는 점에서 내 관심을 끌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도 독서를 통한 지식 습득과 간접 경험 축적이라는 효과를 볼 수 있는데, 구전이 보편적 소통 기술이던 사회에서 독서와 작문이 가능하다는 장점은 그 자체로 특수 계층으로 분류될 능력이다. 오늘날에도 지식인에게 요구하는 사회적 무게를 고려한다면, 고대 지식인들은 더욱 막중한 책임감과 그에 비례하는 부심을 가질 만 하다. 그러나 신명기사가로 추정되는 개인 혹은 집단에 내재한 한계점은 분명하다.

흔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기록자의 승리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신약에서 사도 바울의 지분이 큰 이유 중 하나는 상당 부분 편지 덕분이라고 본다. 역사에 '만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역사는 기록과 증거로 당시 사회를 복원하는 학문이다. 구약에는 구전으로 전해지던 각종 발화를 기억하고 두루마기를 읽을 수 있었으며 글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개인 혹은 집단의 영향이 지대하게 남아 있다. 특히 '심판'과 '회복' 그리고 '언약'이란 주제로 선지서를 읽을 때 이질감이라고 해야 할까 말로 쉽게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드는데, 현재로서는 학자들이 내 머릿 속에 심어준 '신명기사관'의 영향인지 모르겠으나, 후대 편집을 추정하게 만드는 파편들이 느껴진다. 확실한 건, 다윗 메시아사상(Davidic messianism)과 같은 특정 이념에 경도된 개인/집단이 후대 편집을 했다고 볼만한 단서들이 있다.

또한, 계시의 우월성이 느껴진다. 후대 편집의 가능성을 열어둔다고 하더라도 원작 자체에서 위대함을 느낀다. 이사야서는 복수저자설로 워낙 유명한 본문이다. 오늘날 시리즈로 확장되는 영화를 보면 애초에 시리즈로 기획이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원작의 시나리오가 기본적으로 탄탄하고 확장성을 갖고 있다. 나는 이사야가 이런 시리즈물과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이사야가 이사야서 전체를 기록할 수 있다고 믿지만, 설령 후대 편집자가 존재한다고 치더라도 선지자 이사야 본연의 메시지는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후대 편집자가 누구였든 간에 그 역시 특정 이념에 좌우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 아니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함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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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유대교의 기원으로 느헤미야와 에스라를 꼽는다. 흥미롭게도 포로기 문학에서도 이 둘의 영향은 지대하다고 한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관료로 아닥사스다 왕을 섬겼다(1:1; 특히 2:1-10). 우리는 그가 유대 포로민 중 엘리트 계층에 속한 가문 출신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또한 그가 모세의 율법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1:7-9).

에스라는 바벨론 포로 출신이다 (7:6-9, 그의 가문에 관해서는 7:1-5를 보라).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7:6)이었고,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7:10)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느헤미야와 에스라 모두 이스라엘 귀환 공동체의 성전 재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제국 관료로 아닥사스다 왕의 명령으로 성전 재건을 가능케 하는 공헌을 했고, 에스라는 율법 교사로 귀환 공동체가 성전 재건 이후 야웨 신앙 공동체로 회복되도록 이끈다. 둘 다 모세의 율법에 익숙했었다. 바벨론 유수 이후 로마 제국의 통치 이전까지 이스라엘 귀환 공동체의 정착과 신앙 회복이란 측면에서 이 둘의 공헌은 역사에 길이 남을만하다.
 
그런데도 이 두 거인의 의도와는 무관한 부정적인 영향을 부인할 수 없다. 예루살렘 멸망과 포로민의 바벨론 이주 이후 팔레스타인 거주민을 적대시하는 소위 "텅 빈 땅 신화" 그중 하나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역사 해석에서 신명기사관이 과도하게 영향력을 갖도록 한 것이다.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이스라엘 엘리트 가문 후손이자 바벨론 포로민의 후예라는 출신 성분과 모세의 율법에 익숙했다는 공통점이 바로 이 두 지점에서 한계로 나타난다. 에스라가 "주의 종 선지자들"(9:11)의 말씀을 인용하지만, 그 의도는 이방인으로 인해 예루살렘 땅이 더러워졌다는 비판을 하기 위해서다. 이어서 에스라는 통혼 금지 조치를 취한다.   

예언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의 원인이라고 수없이 말한다. 아마도 느헤미야와 에스라, 그리고 후대 신명기사관 편집자는 이 지점에 주목했음이 분명하다.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은 신명기사관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회복은 신명기사관으로 해석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예언자들이 언약을 선포하는 이유이다. 신명기사관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심판은 필연적 결과이지만, 이스라엘의 회복은 그 어디에도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반대로 언약은 이스라엘의 멸망과 회복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이렇듯 신명기사관의 한계는 명확하다. 그래서 나는 신명기사관에 대한 의구심이 들고 있다. 또한 내가 언약 신학의 기능에 일차적 관심을 두고, 더하여 신명기 사관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과연 이스라엘 역사에서 예언서의 위치는 어디인가? 모세의 율법은 신명기사관으로 요약할 수 있는가? 느헤미야와 에스라를 비롯해서 수많은 후대 해석자들이 신명기사관에 집착하는가? 그것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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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들 사이에서도 계파라고 할 수 없지만, 개인에게 좀 더 영향을 많이 준 선대 예언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일례로, 스가랴는 에스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많이 있다. 예레미야의 경우는 아마도 미가가 많은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유다의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시온은 밭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 무더기가 되며 이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렘 26:18)

예레미야는 당시 공공의 적이었다. 비참하게도 고향 사람부터(11:21. cf.1:1), 제사장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예레미야를 죽이고자 했다(18:18-23; 26:8).

이런 분위기에서 예레미야를 변론하는 무리가 있었다(26:16-24). 흥미롭게도, 예레미야의 선포를 뒷받침하는 예언자로 모레셋 사람 미가가 언급된다(26:18).

학계 선행 연구에서는 영향력의 근원을 찾을 때 대선지서를 언급하는 경우가 흔하다. 아마 이런 상황이라면 이사야를 언급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학계의 관행에 따른 예상과 달리, 그 지방의 장로의 일부는 미가를 언급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그 지방에서는, 최소한 그 지방의 장로들 사이에서는 미가의 예언이 진정성 있게 받아들여졌던 모양이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 미가와 예레미야 사이에 목자-왕 전승을 대입해 보면 그 개연성은 더 커진다. 이사야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미가는 목자-왕 전승을 두드러지게 사용한다. 예레미야는 목자-왕 전승을 여러 차례 사용하고 있으며, 특히 23장은 오랫동안 독자들에게 대표적인 목자-왕 전승 본문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미가와 예레미야가 목자-왕 전승을 사용하는 이유는 동일하다. 이 지점에서 이사야 역시 목자-왕 전승을 사용했으나, 그의 관심과 메시지가 갖는 독특한 위치를 강조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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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근동에서 궁극적인 국가의 통치자는 신(god)이며, 왕은 신의 대리자라는 개념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 위에 왕은 통치자로서 정당성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 목자-왕 전승은 목축 사회라는 시대적 토양을 기반한 은유로, 왕의 정당성과 책임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오랫동안 사사의 통치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왕정 국가라는 통치 체제를 요구한다. 하나님은 그 요구를 수용하셨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왕의 통치는 사울부터 시작되었으나, 그의 실패와 다윗이라는 불세출 영웅의 등장으로 다윗 왕조의 통치 기반은 확고해졌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반면교사로 삼지 않은 남유다 왕국은 저들의 멸망이 왕국의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우상 숭배에 빠진 탓이라는 낙인을 찍어 버렸다. 남유다 왕국이라는 이름 자체가 유다 지파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행위이다.

남유다 왕국이 주변 정세 변화와 북이스라엘의 멸망에 대처하는 방법은 군사력 증강과 오랫동안 패권을 잡고 있었던 애굽과 외교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남유다는 풍요로웠고 견고한 동맹국을 확보하고 있었다(이러한 실상은 2:6-8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남유다의 우상숭배는 소돔과 고모라에 비할 정도로 심각했다(1:9-10). 무수한 제물을 드렸으나 그들의 마음은 진정성이 없었다(1:11-15). 북이스라엘의 멸망으로부터 남유다는 실질적인 교훈을 얻지 못했다.

이런 배경에서 이사야가 등장한다. 이사야의 언어는 독특하다. 그중 하나는 "포도원"과 "포도주"(대표적인 사례는 5장을 보라)라는 단어이다. 동시대에 활동한 미가는 목자-왕 전승을 두드러지게 사용한다. 예언서 시작 부분에 기록된 예언자의 신상 정보를 토대로 활동 지역을 예상하는데(사 1:1; 미 1:1), 역사적 재구성의 어려움으로 인해 그들의 언어가 실질적인 판단 기준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가령 이사야는 제사장 가문에서 교육을 잘 받은 엘리트 계층으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도시인이고, 미가는 목축업이 생활 기반인 시골 지역 사람이라고 가정하는 해석자들이 많다. 이사야의 거주 지역 혹은 활동 지역에서 포도원이 주된 사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 미가가 활동한 지역은 목축업이 주요 사업이었던 걸로 보인다. 그들의 청중을 고려한 비유를 통해, 예언자의 활동 무대를 추측할 수 있다고 보인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는 주요 용어는 "포도원"이다(대표적으로 5장). 이사야는 하나님을 포도원의 주인(5장)이나 포도원지기(27:3)로 묘사한다. 반면 타락한 지도자는 하나님의 포도원을 망가뜨린다(3:14). 또한 타락한 지도자는 포도주에 취해 있다(5:11). 포도주는 지도자의 무책임과 남유다 지역의 풍요로움을 동시에 비꼬는 수단일지 모른다. 

이사야 역시 목자-왕 전승을 사용한다(대표적으로 40:11). 그가 여러 차례 목자-왕 전승을 사용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왕으로 대표되는 지도자 집단과 백성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수단으로 목자-왕 전승이 이스라엘 전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단정 지을 수 있다. 단지 이사야의 청중이 목자와 양이라는 은유보다 포도원 비유가 더 효과적인 부류이었다고 추정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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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근동에서 목자-왕 전승은 왕과 백성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은유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이러한 전통이 있었고, 신약에도 곳곳에 목자-왕 전승이 나타난다.

연구 본문이 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이라서 목자-왕 전승은 내 연구의 핵심 주제이다. 그래서 목자-왕 전승에 관한 선행 연구를 제법 검토했는데, 흥미롭게도 이사야를 언급한 연구를 본 적이 없다. (내 기억에만 없을지도 모른다)

이사야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미가는 목자-왕 전승을 여러 차례 사용한다. 이 둘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나훔도 목자-왕 전승을 사용한다(3:18). 이사야 후대에 활동한 예레미야, 에스겔, 스가랴도 목자-왕 전승을 아주 중요하게 사용한다. 목자-왕 전승을 사용한 선지자들은 이 은유를 통해 지도자의 역할을 강조하는 동시에 그들의 방임을 책망한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심판의 명분이 된다. 반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참 목자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회복시키신다. 여기서 내 질문은 시작된다.

'왜 이사야는 목자-왕 전승을 사용하지 않을까?'

밤늦게 이사야서를 통독하며 정답의 근사치를 얻은 듯하다. 내 질문이 잘못되었다. 내가 이사야서를 읽을 때 목자-왕 전승에 주목하지 않은 탓이지, 이사야는 곳곳에 단서를 남겨 두었다. 정말 흥미로운 건, 이사야의 용례에 특이점이 있다.

앞서 언급한 선지자들은 대체로 목자-왕 전승으로 심판과 회복 선포라는 공식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사야는 이러한 공식을 자신의 예언에 사용하지 않는다. 목자-왕 전승의 틀을 사용하지만, 그만의 특정 공식이 되기에는 적용 범위가 부분적이다.

대신 이사야는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 공평과 정의가 그것이다. 많은 선지자들이 목자-왕 전승을 은유로 사용하여 시각적인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 효과를 극대화하지만, 이사야는 공평과 정의라는 직접적인 단어를 사용한다.

이 부분은 차후 연구로 발전 시켜 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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