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에 사용된 표현이 다른 본문에서도 발견된다.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렘 11:19 나는 끌려서 도살 당하러 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으므로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꾀하기를 우리가 그 나무와 열매를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함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시 44:22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잠 7:22 젊은이가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도다
 
Jeremy Schipper, "Interpreting the Lamb Imagery in Isaiah 53," JBL 132, no. 2 (2013):321-322.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의 죽음을 표현할 때 사용된 '어린 양'(잠 7:22에서는 '소')이란 용어는 다른 곳에서도 나타난다.
 
예레미야 11:19과 시편 44:22는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이 겪게 될 무고한 희생과 관련이 있다. 반면 잠언 7:22는 음녀, 말로 호리는 이방 여인(5절)을 멀리하라는 경고와 관련이 있다.
 
이러한 용례에 의하면, 이사야 53:7-8은 예레미야 11:19과 시편 44:22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겪는 고초와 관련이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 부분에서 Schipper는 자신의 견해를 더 개진하지 않지만, 이사야 53장은 레위기의 희생 제물과 연결지어서는 안 된다고 결론짓는다는 점에서 나와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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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rael, Knohl. "The Suffering Servant: from Isaiah to the Dead Sea Scrolls." in Scriptural Exegesis: The Shapes of Culture and the Religious Imagination. Edited by Deborah A. Green and Laura S. Lieber.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https://www.academia.edu/34302811

 

The Suffering Servant: from Isaiah to the Dead Sea Scrolls

The Suffering Servant: from Isaiah to the Dead Sea Scrolls

www.academia.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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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해석가들이 예수의 죽음에 관하여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을 연결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도전을 받고 있다.

예수와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  

역사적으로 이사야가 묘사한 '고난받는 종'은 귀환 공동체의 지도자로 성전 재건에 힘썼던 스룹바벨을 지칭한다. 스룹바벨은 귀환 공동체의 지지와 기대 속에서 성전 재건을 도모하지만, 그래서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되었던 새로운 다윗의 등장이라는 약속을 성취할 자로 추앙받지만, 귀환 공동체의 기대와 달리 그는 비참한 죽임을 당하고 만다. 이사야의 진술은 메시아적 사역을 감당하리라고 기대를 받은 지도자의 사망에 대한 절망과 탄식 가운데 나온 고백이다.

더구나 이사야 54-66장에서 새로운 다윗의 등장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스룹바벨의 죽음 이후에도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55:3)을 말하지만, 새로운 다윗의 등장은 말하지 않는다. 반면 '영원한 언약'(55:3; 61:8)이라는 표현은 몇 차례 나온다. 절망에 빠진 귀환 공동체를 위로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다. 특히 하나님은 귀환 공동체를 향해 '네 남편'(54:5)라는 표현을 사용하신다. 남유다 왕국의 멸망 이후 새로운 다윗의 등장을 선포하는 예언자들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선포하는 예언자들의 등장을 주목해야 한다. 많은 해석가들이 새로운 다윗의 등장에 더 주목하고 있으므로, 이 점을 유의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메시아/그리스도로 추앙받았으나,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이러한 순서는 스룹바벨을 연상시킨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부활하셔서 자신의 궁극적 지상 사역을 성취하셨다. 따라서 예수는 스룹바벨과 구별되어야 한다.

또한 스룹바벨의 죽음 이후 하나님께서 직접 귀환 공동체를 통치하신다고 하셨고,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성령을 허락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자신의 방법대로 성취하신다. 다만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좀더 세심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특히 성경 인용에 관해서는 주의에 주의를 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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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연구자들이 목자-양 비유의 기원을 에스겔 34장과 스가랴 11장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선한 목자의 자기희생은 스가랴 13장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견해라면, 목자-양 비유의 기원과 목자의 자기희생을 스가랴 9-14장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전자의 주장과 달리, 스가랴 13장은 목자의 자기희생을 말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목자-양 비유의 기원과 목자의 자기희생은 스가랴 9-14장으로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목자의 자기 희생에 관한 가르침의 기원을 다른 본문에서 찾아야 한다.

선한 목자의 죽음은 이사야 53장과 비교하거나 요한복음 1:29을 근거로 레위기의 속죄를 들여다봐야 한다. 이 부분은 내 지도 교수이신 David M. Moffitt 박사의 전문 영역이라 앞으로 많은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요한계시록 7:17은 '어린 양'과 '목자'라는 두 주제가 명백하게 드러나지만, 요한복음 이후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근거 구절로 사용될 수 없다. 그럼에도 그같은 사상적 토대가 최소한 요한에게 있었다고 주장할 수는 있다.

다수 주해자들이 선한 목자 담론의 배경으로 초막절을 언급하지만, 그 기원으로 스가랴 14장을 언급하는 이들은 드물다. 더나아가 요한이 유대절기를 자신의 복음서를 해석하는 주요 틀로 사용한다는 주장을 할 필요가 있다.

정리하자면, 나는 선행연구와 달리 스가랴 9-14장을 통해 목자-양 비유의 배경과 초막절을 설명할 수 있으며, 선한 목자의 자기희생은 이사야 53장 혹은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내 입장에서는 선한 목자의 자기희생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지도 교수를 비롯한 독자의 입장에서는 내 전제부터 증명할 필요가 있다. 나의 어려움은 얼마나 집약적으로 내 전제와 추후 연구 계획을 설명하느냐에 있다. 또한 선행연구와 내 연구 사이의 간격을 얼마나 매끄럽게 설명하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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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장에서 선한 목자의 "내어 놓음"(lay down; 10:15, 17, 18)은 전통적인 목자-양 은유에서 나타나지 않는 가르침이다.

모든 선한 목자는 자신의 양떼를 위해 목숨을 걸 준비가 되어 있으나(삼상 17:35; 사 31:4),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은 선한 목자는 그가 유일하다는 John Henry Bernard(John, ICC, Vol 2, 357)의 지적은 옳다.

삼상 17:34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사 31:4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

예수께서는 유대 전승을 사용해 자신의 사역을 예고하셨고, 이같은 가르침은 이미 세례 요한의 선포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29)

이 구절은 레위기의 "속죄"에 비추어 연구되는 경향이 있다. 나 역시 선행연구를 검토하는 단계에서 "속죄"를 연구해야 한다. 하지만 예수는 "내어놓음"으로 표현된 자기 희생이라는 차이점에서 전통적인 "속죄" 개념과 결을 달리 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나는 이러한 이해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추적해야 한다. 아마 이 지점에서 내 지도 교수인 David M. Moffitt 박사와 공통분모를 이루게 되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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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한 목자 담론에서 "자기 희생"과 "유대 절기"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관련 글: 요한복음 10장 선한 목자 담론에서 자기 희생과 절기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자기 희생에 관해서는, 세례 요한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29)는 가르침에 주목하고, 그 배경을 이사야 53장으로 결론짓는 경향성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앞서 "요한복음 10장에 나타난 예수의 죽음에 관한 가르침의 기원, 이사야 53장과 대안"에서 다루었듯이, 이러한 경향에 의문을 제기하는 해석자들이 있다.

나는 선한 목자의 "내어놓음"(lay down; vv. 15, 17, 18)이 1:29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고 주장하겠지만, 그 기원에 관해서는 이사야 53장을 포함해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검토해야 한다.

절기에 관해서는, 우선 초막절을 언급해야 한다. 선한 목자 담론을 다룬 연구들을 보면, 7장에서 시작되는 내러티브의 연속성을 간과하고 초막절을 배제한 연구들이 많다. 반면 초막절을 언급하지만, 그 배경에 관한 연구가 미흡하다.

다음에는 유월절을 언급해야 한다. 현재 나는 1:29와 유월절을 연결하려고 한다. 선행연구에서 이미 1:29이 유월절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나는 다른 방식으로 주장할 예정이다. 나는 단순히 유대적 배경으로서 유월절이 아니라, 요한의 절기 사용에 근거한 유월절과 연관성이 있다고 주장할 예정이다. 아마도 내 연구에서 가장 어려운 논증이 될 수 있다.

"자기 희생"과 "유대 절기"라는 주제는 선한 목자 담론과 세례 요한의 "어린 양" 선포에서 모두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박사 과정에서 이 연구를 성공적으로 마친다면, 나는 더나아가 요한복음을 설명하는 기둥으로 "자기 희생"과 "유대 절기"를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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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은 기독교 신자들에게 꽤나 익숙한 본문이다. 특히 선한 목자의 자기 희생(self-sacrifice, 본문에서는 lay down; vv. 15, 17, 18)이라는 표현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보여준다.

내가 이 본문에서 주목하는 주제는 두 가지, 목자-왕 은유와 유대 절기(Jewish Festivals)이다.  

목자-왕 은유에서는 고대근동문헌(ANET), 구약성경, 제2성전기 문헌을 다루고, 요한복음 10장에 나타나는 특이성을 강조해야 한다. 하지만 선행연구는 대체로 에스겔 34장과 스가랴 9장 등 목자-왕 은유가 나타나는 대표적인 구절을 언급하고, 약간의 해설을 붙이는 선에서 머물고 있다. 해석자는 목자-왕 비유에 나타난 선한 목자의 자기 희생이라는 주제를 강조해야 한다. 이러한 강조를 통해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정수이자 요한이 의도한 유대 메시아 사상의 전복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

유대 절기에 관해서는 선한 목자 담론을 초막절을 배경으로 읽어야 한다. 이 초막절이라는 배경이 목자-왕 은유와 연결되는 주요한 단서가 된다. 왜냐하면 요한이 영향받았을 구약 본문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그가 구약 시대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믿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의 자기희생을 통해 유월절로 시작하는 요한의 절기 흐름을 이해하는 결정적 단서를 풀 수 있다. 물론 본문의 순서에 의하면 순서가 바뀌어야 하지만, 내 연구 범위에 의해 역행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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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내 박사 학위 논문과 관련하여, 내 생각을 정리하는 목적을 위해 작성되었다.

서론은 책의 존재 이유를 설명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론은 책의 출발점을 제시하며, 전개 방향성을 압축하고 있다. 먼저 우리는 요한복음 1장을 통해 예수의 정체와 사역에 관한 가르침을 접하게 된다. 또한, 예수께서 마주하신 동시대 유대인들의 믿음에 대해 알게 된다. 2장은 1장의 연장선이자 예수의 공적 사역이 시작되는 출발점으로 자리한다.

요한복음 1장은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1-18 로고스 기독론
1:19-36 세례 요한의 선포와 세례 베품을 통해 예수의 정체가 밝혀지다
1:37-51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를 따르다

첫번째 단락에서 핵심적인 구절은 1절로, 예수의 신적 정체성을 선언하고 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두번째 단락에서 핵심적인 구절은 29절로, 예수의 궁극적인 사역을 밝히고 있다.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번째 단락에서는 48-50절에 등장하는 나다니엘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나다니엘을 통해 당시 유대인의 믿음을 유추할 수 있다. 나다니엘의 고백은 예수의 신적 능력에서 출발한다.

요한복음 2장은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2:1-12 가나 혼례
2:13-25 성전 청결 사건

가나 혼례 사건에서 예수의 어머니와 제자들의 믿음을 보여준다.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4절을 보면, 예수의 어머니는 예수가 특별한 존재라는 믿음이 있었다. 예수의 특별함이 그의 지혜인지, 아니면 능력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가 예수를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는 전제가 있다.

11절에 의하면, 제자들이 예수를 믿은 이유는 그의 기적이다. 여기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라고 하여 제자들의 남다른 믿음을 부각시키는 해설이 있는데, 실제로는 기적을 행하는 메시아 신앙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성전 청결 사건은 예수의 공적 사역이 시작되다는 분기점이다. 요한이 성전 청결 사건을 진술하는 방식에 유의하자.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요한은 예수의 공식적인 사역, 그가 의도한 첫 사역을 유대인의 유월절과 연결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앞서 가나 혼례 사건에서 언급한 "내 때"(4절)을 의미한다.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유대인들은 예수에게 성전 청결을 행한 표적을 요구하는데, 이는 예수의 정체를 밝히라는 요구이다.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빗대어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신다. 예수의 사역은 십자가 상에서 당할 죽음과 부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제자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한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실제 그 사건들이 발생한 이후에 예수의 가르침을 깨닫게 된다.

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24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은 이유는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알고 계셨고, 그래서 그들에게 자신의 몸을 의탁하지도 않았고 누구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도 않으셨다.

이렇듯 요한복음 1장은 예수의 신적 기원과 지상 사역, 유대인들의 믿음을 드러낸다. 이어서 2장은 예수의 어머니와 제자들의 믿음을 드러내고, 예수의 첫 공식 사역으로서 성전 청결 사건을 통해 그의 구속사적 사건을 가르치며, 유대인들의 믿음을 폭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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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th M. Stovell는 요한복음 1:29-34와 10장을 "왕권"(kingship)으로 설명하면서도, 예수의 죽음이라는 요소를 상세히 다루지 않는다. 또한 절기를 다루지 않는다. 이러한 제약으로 인해 추후 내 글에서 그녀의 책을 다루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언급한 책은 『Mapping Metaphorical Discourse in the Fourth Gospel』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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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내 구상을 정리하는 목적을 위해 작성되었으므로 자세한 인용은 생략한다.

요한복음에서 "헬레니즘과 유대주의"과 "반유대주의와 유대주의"는 주요 논쟁에 속한다. 

1. 헬레니즘 논쟁
요한복음이 헬레니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주장의 근거로는 로고스, 이원론(생명과 죽음, 어둠과 빛 등), 시간 등이 있다.

하지만 로고스는 창세기의 창조 기사를 그 기원으로 설정할 수 있고, 지혜문헌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원론은 지혜 문헌이나 기타 유대 문헌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고, 이러한 대조는 인류 보편적 사고이므로 헬레니즘에 종속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이야기의 전개가 로마식 시간을 사용한다는 주장은 요한이 강조하는 "Jesus' hour"로 반박이 된다. 대표적인 예는, 가나 혼례식에서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2:4)라는 말씀에서 나타난다. 이후 예수께서는 이적을 행하시는데 주저하지 않으신다. 또 다른 예로는,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박해로 인한 살해 시도에는 물러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죽음의 시기를 조절하셨다. 내 기준에서는 절기가 요한복음의 유대주의적 성격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2. 반유대주의 논쟁
요한복음이 반유대주의적이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는 모세의 율법과 대립되는 양상, 회당 축출(9:22) 등으로 인해 고립된 기독교 공동체의 상황을 상정한다. 

하지만 예수는 모세의 율법과 자신의 가르침이 어긋나지 않다고 가르치신다. 대표적으로 5:45-46이 그 근거가 된다.

45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46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회당 축출의 역사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고, 예수의 사후와 예루살렘 성전 파괴 사이 30년 정도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한 상황에서, 회당이 큰 의미를 가질지 의문이다.


3. 요한의 유대주의적 사고
요한복음이 유대주의를 긍정적으로 사용한다는 단서들은 쉽게 찾을 수 있다. 다만 유대 전통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변형적으로 사용하여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 한다는 특수성을 유념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다윗 계열의 구원자 사상(Davidic Messianism)과 유대 절기를 예로 다루어본다.

내가 '다윗 계열의 구원자 사상'이라고 풀어 쓰는 Davidic Messianism은 분열 왕국의 멸망 이후 예수의 지상 생애 당시까지 이어졌다. 요한복음에는 10:1-21과 12:12-16에서 그 사상이 나타난다.

10:1-21은 흔히 '선한 목자 담론'로 불리며, '새로운 다윗과 같은 왕'의 등장을 고대하는 목자-왕 전승을 사용했다. 다만 요한은 이 전통적인 목자-양 은유를 사용하여 대적을 물리치고 새로운 왕국을 세울 왕이 등장한다고 기술하지 않고, 예수의 가르침을 토대로 목자의 희생을 설파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12:12-16도 동시대 유대인들이 Davidic Messianism를 갈망했다는 단서가 된다.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유대인들은 다윗의 후손 중에, 아니면 다윗과 같은 지도자가 등장하여 열국을 제압하고 왕으로 추대되어 예루살렘에 입성한다고 믿었다(12-15절). 예수의 제자들도 그렇게 믿었었으나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제자들은 이 예언의 참된 의미를 깨달았다(16절).

요한복음의 저자는 유대인들이 갈망했던 Davidic Messianism를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

요한복음의 절기는 또다른 유대주의의 증거이다. 요한의 예수는 절기에 맞추어 움직이신다. 물론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는 유대인들로부터 반박을 일으키지만, 결과적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확고한 두 기둥을 위한 의도적인 장치로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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