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이사야서에서 목자-양 은유는 총 다섯 번 사용되었다 (5:17; 13:14; 38:12; 40:11; 44:28).

5:17 그 때에는 어린 양들이 자기 초장에 있는 것 같이 풀을 먹을 것이요 유리하는 자들이 부자의 버려진 밭에서 먹으리라
13:14 그들이 쫓긴 노루나 모으는 자 없는 양 같이 각기 자기 동족에게로 돌아가며 각기 본향으로 도망할 것이나
38:12 나의 거처는 목자의 장막을 걷음 같이 나를 떠나 옮겨졌고 직공이 베를 걷어 말음 같이 내가 내 생명을 말았도다 주께서 나를 틀에서 끊으시리니 조석간에 나를 끝내시리라
40:11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44:28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


이사야의 용례는 네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목양의 상태에 따라 다른 상황에 놓인 양 떼의 상황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처지를 그린다 (5:17; 13:14). 두 번째는 목자의 장막 이동을 통해 하나님의 거처, 즉 성전 파괴를 예고하고 있다 (38:12).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 목자로서 이스라엘을 돌보신다는 약속이다 (40:11). 네 번째는 이례적인 이방 목자의 등장을 다루고 있다 (44:28).

이 같은 용례는 이사야가 목자를 하나님과 왕/지도자를 지칭하는 데 사용하며, 양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데 활용한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는 목자-양 은유 혹은 목자-왕 전승의 전형적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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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은 기독교 신자들에게 꽤나 익숙한 본문이다. 특히 선한 목자의 자기 희생(self-sacrifice, 본문에서는 lay down; vv. 15, 17, 18)이라는 표현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보여준다.

내가 이 본문에서 주목하는 주제는 두 가지, 목자-왕 은유와 유대 절기(Jewish Festivals)이다.  

목자-왕 은유에서는 고대근동문헌(ANET), 구약성경, 제2성전기 문헌을 다루고, 요한복음 10장에 나타나는 특이성을 강조해야 한다. 하지만 선행연구는 대체로 에스겔 34장과 스가랴 9장 등 목자-왕 은유가 나타나는 대표적인 구절을 언급하고, 약간의 해설을 붙이는 선에서 머물고 있다. 해석자는 목자-왕 비유에 나타난 선한 목자의 자기 희생이라는 주제를 강조해야 한다. 이러한 강조를 통해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정수이자 요한이 의도한 유대 메시아 사상의 전복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

유대 절기에 관해서는 선한 목자 담론을 초막절을 배경으로 읽어야 한다. 이 초막절이라는 배경이 목자-왕 은유와 연결되는 주요한 단서가 된다. 왜냐하면 요한이 영향받았을 구약 본문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그가 구약 시대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믿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의 자기희생을 통해 유월절로 시작하는 요한의 절기 흐름을 이해하는 결정적 단서를 풀 수 있다. 물론 본문의 순서에 의하면 순서가 바뀌어야 하지만, 내 연구 범위에 의해 역행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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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주제(=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에 나타난 예수의 죽음)의 영향 탓인지, 요한복음을 분석할 수록 이 복음서가 구전되고 기록되었을 당시 상황은 매우 암울했다고 그려진다.

세례 요한이 예수를 일컬어 '하나님의 어린 양'(1:29, 36)과 '하나님의 아들'(1:34)이라는 모순적 표현이 중첩된다. 특히 요한복음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1:29)라는 문구를 통해 예수의 죽음을 강력하게 드러내고 있다.

본문에서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요한복음 저작 연대를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로 본다. 성전 중심의 신학을 공유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성전 파괴는 그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사건이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예루살렘 성전과 연결하는 중요한 의도가 이 지점과 맞닿아 있다.

유대인들은 오랫 동안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를 고대했다. 1세기는 헤스모니아 왕조 이후 메시아 사상이 고취되어가던 시기였다. 이때 예수는 유대인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메시아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가르쳤고 실제로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메시아 사상의 정점에 닿아 있는 다윗을 최대한 언급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유대인들의 기대를 자극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속사를 가르치기 위함이다. 나는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이 그 정점에 있다고 본다.

요한복음의 마지막은 예수의 부활 이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이다. 특히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21:15-17)고 명령하신 부분이 인상 깊게 남는다. 또한 예수께서 베드로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다.

반면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는 살아남는다. 그는 사도들의 순교에도 살아남아서 요한복음서를 기록한다(21:24-25).

예수의 부활을 붙들지 않는다면, 요한복음을 읽는 독자들은 암울한 분위기에 사로잡힐 수 있다. 어쩌면 예수의 생애를 공유했던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와 동일한 좌절감에 빠질지 모를 일이다.

이런 총체적인 상황에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해야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고 설득해야했다. 요한복음 1장이 로고스 기독론으로 시작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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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의 저자를 사도 요한으로 보는 견해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러한 영향 아래 요한복음을 해설하면서 요한계시록과 연결하는 시도가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아래는 그 중 하나의 예이다.

이 예언적인 "만화"는 그 선지자가 독자적으로 작성한 것이었을 것이며 십중팔구 그 묵시로 통합되기 전에 요한 학파의 구성원들에게 알려졌을 것이다.
[출처] 비슬리-머리, 요한복음, 443.


난 이미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의 목자 은유를 살펴 본 적이 있다. 내 관찰에 의하면,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은 스가랴 9–14장의 목자-왕 은유를 동일하게 적용한다.  

하지만 나는 의도적으로 요한복음을 해석할 때 요한계시록을 배제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현 연구에서 후대 자료는 언급을 자제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행이 나에게 도움만 되는 건 아니다. 특히, '어린 양'과 목자-왕 전승 사이의 유기적 관계를 설명하려면, 요한계시록을 인용하는 편이 수월하다. 역으로, 요한복음에서 두 주제의 관계를 설명하려면, 요한복음의 흐름 전개를 아주 치열하게 분석해야만 한다.

요한복음의 어린 양과 목자-왕 전승

내 추정에 의하면, 요한복음에서 '어린 양'과 목자-왕 전승은 유대 절기라는 또다른 장치에 의해 설명이 가능하다. 절기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폭넓게 인정되고 있는데, 과연 내 관찰을 글로 풀어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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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예수의 죽음을 통한 대속 사역을 말하는 동시에 차후 요한공동체에 닥쳐올 (이미 현실로 마주하고 있는) 요한공동체의 수난을 암시할 수 있다.

21: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여기서 목자-양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 독특하게도,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과 마찬가지로, 목자의 죽음을 진술하고 있다.

두 구절은 예수의 죽음 이후 초대교회, 좁게는 요한복음의 청중들이 마주하고 있는 수난을 담은 본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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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선한 목자 담론'으로 일컬어지는 요한복음 10:1-21에 이어 10:22-42에도 목자-양 은유가 사용된다.

예수께서는 앞서 강도와 목자의 구분, 목자의 희생 등을 가르치셨고 (1-18절), 유대인 사이에 벌어진 분쟁(19-21절)이 벌어졌다. 이 분쟁에 대한 답을 얻으려는 일부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확답을 얻고자 질문을 던지고 예수께서 대답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22-42절).

유대인의 질문은 "당신이 ...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24절). 요한복음은 모세와 율법 등을 전면에 내세우고, 다윗 계열의 메시아 사상(Davidic messianism)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새로운 다윗의 등장이라는 사상을 통해 군중이 기대하게 되는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상을 배제하려는 의도가 크다. 아마도 이 '그리스도'라는 언급은 오랫 동안 예언되어 온 다윗의 후손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다. 당시에는 누구든지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해도 종교 심판을 받지는 않았다.

예수는 유대인들의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의 불신앙을 지적하신다(25절). 더나아가 목자-양 은유를 사용해 그들이 자신의 양이 아니라고 지적하신다(26-27절).

그리고 다시한번 목자-양 인유를 통해 예수와 유대인들 사이의 관계를 정립하신다. 예수는 신앙의 대상이시며, 우리는 그를 따르는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유대인들과 예수 사이에 어긋한 대화는 유대인들이 원하는 것, 즉 로마로부터 이스라엘 독립을 이룰 군사적 메시아(24절)와 예수의 긍극적인 사역, 즉 영생을 주는 것(28절) 사이에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이 관계로 예수께서 답을 마치신다(28-30절).

여기서 배경으로서 '수전절'(22절)을 이해해야 한다. 요한복음에서 절기는 문맥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수전절에 관해서는 구약과 중간기 문헌을 살펴봐야 하는데, 여기에서는 짥막한 인용으로 대신한다.

"수전절의 제정은 제1마카비서 4:59에서 묘사된다. ... 그런데 그것의 목적은 이제 안디옥으로부터의 구출과 성전 예배의 갱신을 기념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비슬리-머리, 요한복음, 383).

유대인의 질문과 예수의 답변 사이에 수전절의 기능이 드러난다. 즉 영적 죽음에 놓인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예수의 사역을 통해, 그리고 더이상 예루살렘 성전이 존재하지 않는 지상에서, 오로지 하나님과 함께 예수를 예배의 대상으로 섬겨야 한다는 가르침이 10:22-42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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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들 사이에서도 계파라고 할 수 없지만, 개인에게 좀 더 영향을 많이 준 선대 예언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일례로, 스가랴는 에스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많이 있다. 예레미야의 경우는 아마도 미가가 많은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유다의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시온은 밭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 무더기가 되며 이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렘 26:18)

예레미야는 당시 공공의 적이었다. 비참하게도 고향 사람부터(11:21. cf.1:1), 제사장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예레미야를 죽이고자 했다(18:18-23; 26:8).

이런 분위기에서 예레미야를 변론하는 무리가 있었다(26:16-24). 흥미롭게도, 예레미야의 선포를 뒷받침하는 예언자로 모레셋 사람 미가가 언급된다(26:18).

학계 선행 연구에서는 영향력의 근원을 찾을 때 대선지서를 언급하는 경우가 흔하다. 아마 이런 상황이라면 이사야를 언급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학계의 관행에 따른 예상과 달리, 그 지방의 장로의 일부는 미가를 언급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그 지방에서는, 최소한 그 지방의 장로들 사이에서는 미가의 예언이 진정성 있게 받아들여졌던 모양이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 미가와 예레미야 사이에 목자-왕 전승을 대입해 보면 그 개연성은 더 커진다. 이사야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미가는 목자-왕 전승을 두드러지게 사용한다. 예레미야는 목자-왕 전승을 여러 차례 사용하고 있으며, 특히 23장은 오랫동안 독자들에게 대표적인 목자-왕 전승 본문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미가와 예레미야가 목자-왕 전승을 사용하는 이유는 동일하다. 이 지점에서 이사야 역시 목자-왕 전승을 사용했으나, 그의 관심과 메시지가 갖는 독특한 위치를 강조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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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근동에서 궁극적인 국가의 통치자는 신(god)이며, 왕은 신의 대리자라는 개념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 위에 왕은 통치자로서 정당성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 목자-왕 전승은 목축 사회라는 시대적 토양을 기반한 은유로, 왕의 정당성과 책임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오랫동안 사사의 통치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왕정 국가라는 통치 체제를 요구한다. 하나님은 그 요구를 수용하셨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왕의 통치는 사울부터 시작되었으나, 그의 실패와 다윗이라는 불세출 영웅의 등장으로 다윗 왕조의 통치 기반은 확고해졌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반면교사로 삼지 않은 남유다 왕국은 저들의 멸망이 왕국의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우상 숭배에 빠진 탓이라는 낙인을 찍어 버렸다. 남유다 왕국이라는 이름 자체가 유다 지파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행위이다.

남유다 왕국이 주변 정세 변화와 북이스라엘의 멸망에 대처하는 방법은 군사력 증강과 오랫동안 패권을 잡고 있었던 애굽과 외교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남유다는 풍요로웠고 견고한 동맹국을 확보하고 있었다(이러한 실상은 2:6-8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남유다의 우상숭배는 소돔과 고모라에 비할 정도로 심각했다(1:9-10). 무수한 제물을 드렸으나 그들의 마음은 진정성이 없었다(1:11-15). 북이스라엘의 멸망으로부터 남유다는 실질적인 교훈을 얻지 못했다.

이런 배경에서 이사야가 등장한다. 이사야의 언어는 독특하다. 그중 하나는 "포도원"과 "포도주"(대표적인 사례는 5장을 보라)라는 단어이다. 동시대에 활동한 미가는 목자-왕 전승을 두드러지게 사용한다. 예언서 시작 부분에 기록된 예언자의 신상 정보를 토대로 활동 지역을 예상하는데(사 1:1; 미 1:1), 역사적 재구성의 어려움으로 인해 그들의 언어가 실질적인 판단 기준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가령 이사야는 제사장 가문에서 교육을 잘 받은 엘리트 계층으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도시인이고, 미가는 목축업이 생활 기반인 시골 지역 사람이라고 가정하는 해석자들이 많다. 이사야의 거주 지역 혹은 활동 지역에서 포도원이 주된 사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 미가가 활동한 지역은 목축업이 주요 사업이었던 걸로 보인다. 그들의 청중을 고려한 비유를 통해, 예언자의 활동 무대를 추측할 수 있다고 보인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는 주요 용어는 "포도원"이다(대표적으로 5장). 이사야는 하나님을 포도원의 주인(5장)이나 포도원지기(27:3)로 묘사한다. 반면 타락한 지도자는 하나님의 포도원을 망가뜨린다(3:14). 또한 타락한 지도자는 포도주에 취해 있다(5:11). 포도주는 지도자의 무책임과 남유다 지역의 풍요로움을 동시에 비꼬는 수단일지 모른다. 

이사야 역시 목자-왕 전승을 사용한다(대표적으로 40:11). 그가 여러 차례 목자-왕 전승을 사용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왕으로 대표되는 지도자 집단과 백성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수단으로 목자-왕 전승이 이스라엘 전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단정 지을 수 있다. 단지 이사야의 청중이 목자와 양이라는 은유보다 포도원 비유가 더 효과적인 부류이었다고 추정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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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 되신 하나님의 백성 -에스겔 34장의 신학적인 담화 / 박영복(백석대신학대학원, 구약학) / Canon &* Culture 9권 1호 2015 봄

http://www.itheology.kr/canon/cc_read.php?menu=&search=&searchtxt=&mode=list2&mode=view&idx=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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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는 130~140년경 로마에서 비오 교황(140~155년)의 형제인 헤르마스가 저술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고대 교회의 일부 공동체에서 전례 때 공식적으로 낭독되고 경전으로 인정될 만큼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목자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세례를 받은 뒤 죄를 지은 그리스도인에게 구원의 방법을 제시하는 회개이다. 고대교회의 회개는 오늘날의 고해성사에 해당한다.

복음서와 사도들의 편지를 보면 사람들이 서로 죄의 용서를 청하기도 하고 용서를 받기도 하는 모습이 확인된다. 그런데 고대교회에서 참회한 죄인들의 모든 죄는 늘 용서받는다는 확신이 이후로도 계속 변하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요한의 첫째 편지에는 이러한 변화를 암시하는 몇몇 구절이 있다. 『한번 빛을 받아서 하늘이 내린 선물을 맛보고 성령을 나누어 받는 이들이, 그리고 하느님의 선한 말씀과 앞으로 올 세상의 권세를 맛본 이들이 이제 배반하고 떨어져 나간다면 다시는 회개하여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하느님의 아드님을 거듭 십자가에 못박고 모욕하는 것입니다』(히브 6, 4-6).

2?3세기에 노바티아누스파와 다른 엄격주의자들은 이 구절들을 엄격한 회개의 의미로 해석하였다. 또한 세례 후 중죄를 지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마침내는 공동체에서 내보내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한편 다른 이들은 매우 권위적이고 결정적인 이 문구들을 엄격한 규율 조치로서보다는 당시의 절박한 상황에 대처할 교훈적 경고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히브 6, 4에서 말하는 회개의 불가능은 원칙적 불가능이 아니라, 대개 배교자는 다시 회심하기 어렵다는 것을 경험상 알 수 있기 때문에 허구적 불가능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회개가 고대교회에서 어떻게 개별적으로 행해졌는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불분명하다. 다만 1~2세기 전환기와 2세기 전반기에 씌어진 일부 작품에서 회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목자의 회개론은 2세기 중엽의 신학 발전을 이끄는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회개 논쟁은, 세례를 받은 뒤 회개를 금하는 당시의 상황에서 헤르마스가 처음으로 세례 후의 회개와 용서를 선포하였는지, 아니면 여러 번에 걸쳐 이루어진 회개를 단 한 번으로 제한하였는지에 관한 문제에서 출발하였다. 첫째 경우는 헤르마스가 교회의 성성 때문에 세례 후 회개를 거부한 원시 그리스도교의 엄격함을 완화하였다는 입장이고, 둘째 경우는 그가 단 한 번으로 제한된, 일반적인 회개 관습을 강화하였다는 입장이다. 지금까지 논의된 본문을 바탕으로 살펴보면 둘째 해석이 더 그럴듯하다. 왜냐하면 실제로 교회는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서 절대로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엄격한 조건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그리하여 회개할 뜻이 있는 죄인을 교회에 다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헤르마스가 세례 후 회개를 한 번 더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세운 것은 이전의 관대한 관습을 더 엄격하게 강화한 것이라 하겠다. 그 이후로 고대 그리스도교는 세례를 받은 뒤 다시 지은 죄에 대해 한 번의 회개만 허용하였다.

한 번만 허용된 고대교회의 엄격한 회개는 신자들에게 크나큰 희생을 요구하는 엘리트 교회의 관습이었다. 이 때문에 이미 테르툴리아누스 이래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공개적인 회개 조치로 자기 약점이 온 세상에 드러나게 되자 수치심을 느끼고 회개를 멀리하였다. 그리하여 신자들이 교회의 용서를 얻기보다 오히려 죄지은 상태에 머무르려 한다는 개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러한 개탄은, 콘스탄티누스가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 뒤 많은 사람이 교회로 몰려들면서 더 심화되었다.

교회는 새로운 상황을 맞으면서도 유연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 많은 점에서 회개 규정들을 더욱 강화하였다. 특히 일회적 회개 원칙은 서방에서 철저히 지켜졌다. 이 경우 회개에 부과된 보속이 강화되어 -예를 들어 평생 성관계를 갖지 않는 것- 지키기도 힘들고 어렵게 되자 회개는 점점 더 임종 때까지 연기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회개한 사람은 교회에 받아들여진 뒤 거의 수도자와 같은 생활을 해야 했다. 게다가 회개를 하고 나면 일반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권리를 갖지 못하게 하여, 성직자가 될 수 없으며, 어떤 공적인 교직도 맡지 못했다.

회개는 세례의 특성처럼 한 번밖에 할 수 없다는 생각이 확고해지면서 적지 않은 문제가 뒤따랐고, 회개 제도 전체가 위기에 빠졌다. 죄를 지은 그리스도인은 교회에서 정한 회개를 죽을 때까지 연기하기 시작하였고, 교회는 이를 감수해야만 했다. 더구나 506년 아그드 교회회의는 사목적인 이유에서 35세 이하의 젊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금하였다. 538년 오를레앙 교회회의는 나이 든 이들도 배우자의 동의가 있을 때만 회개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로써 회개는 실제 삶에서 멀어져 사랑과 용서의 공동체 성격이 사라지고, 생명을 위한 용서의 성사가 죽음을 준비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러한 풍조는 세례 자체에도 영향을 미쳤다. 사람들은 세례 후 회개하는 것보다 평생 세례지원자로 있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여 세례를 죽을 때까지 미루었다. 사람들은 「세례복을 입은 채 사망한」이라는 표현을 묘비에 자랑스럽게 기록하였다.

이 갈등상황의 해결은 5~6세기에 접어들어 세계의 변두리인 아일랜드와 영국에서 사목적 필요성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 지역 사람들은 먼저 공개적인 회개를 포기하기 시작하고, 주교나 사제, 수도자에게 개인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보속을 받았다. 이는 아일랜드와 영국이 대륙 선교를 나서면서 서방에 널리 퍼져 일반적인 해결책이 되었다. 모든 신자가 해마다 한 번씩 고해성사를 보아야 한다는 규정은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결정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하성수 박사(한님성서연구소)


[출처] 교부들의 가르침 (6) 헤르마스의 목자 / 하성수 박사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article_view.php?aid=139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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