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예언자의 자질

성찰 2022. 5. 17. 21:41

*이 글은 내 생각을 정리하는 성격을 갖고 있어서 순전히 내 사고에 의존하고 있다.
*현재는 박사 학위 취득을 위해 요한복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내 연구 범위 내에 예언서가 주요 본문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차후 기회가 된다면 예언에 관한 연구를 개진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나는 구약 예언자들 중 예레미야를 최고의 예언자로 꼽는다. 내가 볼 때 예레미야는 예언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을 다 가지고 있다.

예언자는 미래를 말하는 사람이다. 이스라엘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계시하신 미래를 선포했다. 예언자가 선포하는 미래는 현재 상황과 맞물려 있다. 현재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 숭배와 타락의 길을 걷고 있으면, 다가올 미래는 심판이라고 선포한다. 반면 청중이 현재 고난과 압제에서 신음하고 있다면, 미래에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다고 선포한다. 즉 예언자의 미래는 이스라엘 백성의 현재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에 더하여 예언자의 현실 인식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먼저, 예언자의 미래 인식(Prophetic Futurology)을 파악해야 한다. 예언자는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는다.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미리 알고 있으므로, 앞으로 발생하게 될 일들에 대한 독자적인 인식이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에서 도출된 예언자의 인식에 맞추어 말과 행동으로 표출하게 된다.

다음, 예언자의 현실 인식 능력을 파악해야 한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심판을 선포해야 할 때에 축복을 선포한 거짓 예언자들이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심판의 때에 속했는지, 축복의 길에 서 있는지 분별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던 시대에 수많은 예언자들이 있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멸망 위기 속에서 바벨론과 유대해야 한다고 선포하지만, 수많은 예언자들은 오랜 동맹인 이집트의 손을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예레미야, 그리고 그를 적대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위기라는 현실을 공유했지만, 현실을 인식하는 능력에서 차이가 있었다. 나는 예레미야의 현실 인식이 순전히 하나님의 계시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국제 정세를 내다볼 수 있던 능력에서 기인했는지 궁금하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계시에서 출발한다고 보지만, 예레미야의 현실 자각 능력이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예언자의 역사관을 파악해야 한다. 예언자의 미래 인식은 현실 인식 능력만이 아니라 역사관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는다. 예레미야와 거짓 예언자들은 유사한 역사관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선조들의 역사에 해박했고, 이집트를 의지해서 생존했던 과거를 알고 있다. 이같은 과거에 의존한 이들이 거짓 예언자들이다. 그들과 달리 예레미야는 더이상 과거의 반복이 아닌 새로운 역사가 전개된다고 믿었다. 이런 새로운 미래를 보는 힘은 바로 하나님의 계시에서 출발한다.

더 다양한 사례를 들어 예언자의 자질 세 가지를 설명해야 하지만, 예레미야라는 한 인물을 통해서 대략적인 요지는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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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 역사를 보면, 조선 말기 기독교인들은 복음대로 살려고 했다는 기록들이 남아 있다. 탄압에 의해 순교자들이 발생해도 신앙을 굳걷히 지켰던 믿음의 조상들의 피가 이 땅의 복음화를 앞당겼다.
 
현대 사회에 기독교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그 요인 중 하나가 기복주의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복'이라는 말에 이끌려서"교회 다니면 복 받는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라는 구호에 교회를 다니게 된 사람들이 많다. 그 '복' 때문에 교회에 왔는데, 나는 언제 남들처럼 '복' 받나 싶어서, 신이 자신만 외면하는 거 같아서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많다.
 
교회 성장에 눈먼 목사들이 '전도'와 '복음화'를 명분으로 삼는다. 정작 자신은 전도는 커녕 복음 선포도 안하면서, 부교역자에게 출석인 수로 압박하고, 교인들에게 전도를 강요한다. 교인 수가 증가하면, 지가 잘난 줄 알고 사례비 늘리고 좋은 차로 바꿔탄다.
 
기독교 가정이라는 명분 아래, 특히 목사와 장로 등의 자녀들이 믿음 없이 교회를 다니고 신학교에 가는 사례들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그들의 이름은 성경 인물을 본따 지었을 텐데, 부모가 자녀의 이름만큼이나 신중하게 교육을 시켰는지 의문일 때가 있다.
 
나는 기독교의 역성장이 어떤 면에서 교회의 정상화라고 생각한다. 복음을 제대로 알게 되면, 믿음이 아니고서는 교회에 다닐 수 없고 기독교인으로 남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진정한 복음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루터기와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복음에 제대로 사로 잡힌 하나님의 일꾼들이 일어난다면, 진정한 부흥이 일어날 수 있는 시대라고 믿는다. 복음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설교 수없이 쏟아지지만, 성도들 삶은 왜 변화되지 않을까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47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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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학자들은 고대 근동부터 랍비문헌까지 참고할 수 있다. 풍부한 자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성경이 구전되고 기록으로 통용되던 시대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지식과 그들이 향유한 문화를 동일하게 접근할 수 없다는 한계는 명확하다. 그럼에도 거시적 흐름과 미시적 현상을 분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몇몇 학자들은 복음서를 연구하며 유대 전승의 세부 사항과 연결해 적용하려는 시도를 한다.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을 사례로 들면, 유월절과 예수의 죽음을 성전 제단과 연결하고, 선한 목자 담론을 므리바 전승(Meribah Tradition)과 연결하는 식이다. 문헌적 자료를 이용해 본문 해석을 도출하는 과정에서 시도해 볼만한 접근이지만, 결과적으로 과도한 연결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나는 미시적 현상보다는 거시적 흐름에서 나타나는 연속성이 갖는 의미가 본문 해석에 더 효율적이라는 입장이다.
 
복음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유일무이한 사건을 증언하려는 목적으로 기록되었다. 이 증언은 유대인들의 사고와 전통에 벗어나 있고, 이방인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유대인들에게는 증거와 동시에 변증적 성격을 가져야 한다면, 미시적 현상을 강조하기 보다는 거시적 흐름을 통해 접근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본다. 또한 유대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이방인들에게도 세부적인 설명은 지양하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주제를 강조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배경적 설명을 활용해야 한다.

물론 현대 학자들은 본인이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자료들을 검토하고 그 과정에서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 그러나 거시적 흐름과 미시적 현상을 동시에 염두에 두고 본문을 해석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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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비교분석을 통해 각 자료별 고유성을 발견한 후 공통분모를 찾아 집단 분류(grouping)를 해야 한다. 가령 '요한복음 7장 37-39절의 배경은 어디인가?'라는 주제를 다룬다면, 몇 가지 주장으로 분류할 수 있다. 각 자료가 새로운 본문을 배경으로 제시할 수도 있고, 기존 주장 중 하나를 선택하되 전에 없던 근거를 제시하는 방식을 취할 수 있다. 둘 중 어떤 방식을 취해도 '독창성'이란 가치를 갖는다.

집단 분류를 하면 연구사 개관을 작성하는 작업이 수월해진다. 각 집단 별 공통된 주장과 근거를 찾아내고, 차이점에서 저자별 기여를 부각시키면 된다. 비교분석 단계에서 자료마다 취한 결과를 집단 분류 과정에서 재조합한다고 보면 된다.

집단 분류를 통해 어떤 주장이 대세를 취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 각 주장별 장담점을 파악할 수 있다. 내 견해에 어디에 속하는지, 아니면 어디에 가까운지 파악할 수 있다. 자신의 주장과 근거가 집단 분류에 포함되지 않고 새로운 집단을 형성한다면, 충분히 선행연구를 분석하지 않았거나 정말 놀라운 기여를 하게 되거나 둘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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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국 교회가 죽어가지만, 오순절 계통 교회는 부흥하고 있다고 한다. 스코틀랜드에 거주하는 기간 동안 여러 영국 교회를 방문해보고 싶다.
2.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오순절 계통이고 한국에 있지만, 건강한 신앙 양육에는 실패했다. 한국은 예외적으로 장로교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곳인데, 그렇다고 건강한 신학을 바탕으로 신앙 교육을 이루었는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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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시대 오나… 3년 뒤 무신론자 줄고 기독교인 더 늘어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6736199&code=612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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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학교에서는 교수들부터 박사 과정 학생을 연구자이자 박사 후보생으로 대우해준다. 동시에 여전히 지도가 필요한 학생으로 본다. 이같은 인식에서 박사 과정 학생은 세 가지 태도를 갖춰야 한다.
 
신중해야 한다. 교수들은 박사 과정 학생에 대한 기대치가 있다. 여전히 지도가 필요한 상태이지만, 박사 후보생으로서 발언과 주장이 학자로서 평가를 받는다. 주제와 상관 없이 자신의 주장을 섣불리 결정하거나 표출해서는 안되며, 주장에는 반드시 근거가 있어야 한다.
 
용기가 필요하다. 박사 과정 학생은 선행 연구를 답습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자신만의 새로운 견해를 창조해야 한다. 따라서 선행 연구를 뒤집거나 방향을 선회하거나 보완해야 한다. 지도 교수를 비롯해 심사 위원 누구라도 내 주장에 반박할 수 있다. 오랜 세월 동안 견고한 성을 구축한 학문의 세계에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려면 담대한 용기가 있어야 한다.
 
겸손해야 한다. 자신의 분석과 참신한 주장이 매력적으로 여겨진다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본인의 생각일 뿐이다. 내 견해는 수 많은 주장 중 하나이며,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또한 수많은 선배들이 공들여 쌓아올린 선행 연구를 통해 끊임 없이 배우며 자신의 주장과 견해를 수정하고 보완해야 한다.
 
지난 박사 과정 1년 동안 가장 도전 받은 영역은 학습법이나 글쓰기 등 연구 능력이 아니라 바로 정신의 영역이다. 선행 연구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지도 교수의 피드백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정신 상태가 나가는 일이 종종 있다. 매 과정마다 성장통이 적잖았는데, 이번 박사 과정에서도 만만치 않은 압박이 있다. 이제 1년이 지났으니 적응력이 좀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 뭐든 첫 1년이 힘든 법이니까, 앞으로는 좀 낫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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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 2021. 11. 26. 00:40

본문에는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동시대적 자료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사상이 있다면, 현 연구 본문에도 적용해도 되는가?

 
최소주의를 지향하는 나로서는, 연구 본문에서 유추할 수 없는 자료는 인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질문은 나에게 크나큰 부담이 된다. 하지만 난 결국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전략 1. 선행 연구의 주장을 수용하고 최근 연구 자료를 보강하면서 내 견해를 만든다.
 
전략 2. 선행 연구의 주장을 거부하고 내 방식대로 주장을 펼친다.
 
원칙적으로는 2번을 고수하고자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버거움이 뒤따른다. 2번을 선택해도 더이상 내적 확신을 가질 수 없다.
 
그렇다면 1번이 현명한 답안이 되지 않을까 싶다. 솔직히 지금은 1번이 전적으로 수용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끊임 없이 배워야 하는 학생이라는 것, 지도 교수는 이미 검증된 전문가로서 자신의 확고한 견해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더불어 혹시나 내가 나만의 세계에 갇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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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내 경험과 상황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다분히 주관적이다.
 
대안학교에서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3년 정도 독서 토론을 재능 기부 형태로 진행한 적이 있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초반에 토론으로 진행하다가 후반에는 글쓰기로 전환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토론다운 토론이 진행되지 않는다. 자기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할 줄 모르고, 상대방의 주장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차라리 글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자신의 생각을 적도록 하는 방향이 더 효과적이었다.
 
영미권에서 세미나와 토론 시간을 보면, 대체로 발표자들은 완성도가 낮은 아이디어 차원의 발상을 일정 수준으로 발효시켜서 의견을 개진해보는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발표자가 설익은 아이디어을 꺼내 청중과 대화를 통해 발전시킨다는 인상이 강하다. 유독 한국인들은 완성된 원고를 발표 이전에 나눠주고 읽기 때문에 아이디어의 구현 완성도가 높으며, 청중으로부터 질문이 덜 들어온다.
 
미국 Calvin Theological Seminary에서 Master of Theology 과정을 하고 있을 때, 수업에서 시험을 치르긴 했어도 가장 큰 점수를 차지하는 건 paper였다. 자율연구(independent study)는 100% paper로 평가받는다.
 
현재 재학 중인 영국 학교에서는 세미나나 스터디 그룹 공고는 하지만 의무 사항이 아니다. 지도 교수마다 지도 방법이 다르겠지만, 내 지도 교수의 경우 신약학부 교수들이 전원 참석하는 세미나를 권했을 뿐 그마저도 의무 참석이 아니었다. 최근 스터디 그룹 홍보에는 "글 쓰느라 바쁘겠지만 일단 공고가 있으니 이메일을 돌린다"라고 써서 보내셨다.
 
현재 distance learning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있고, 이제 2년 차에 접어들어서 차후 진행 상황을 잘 모르지만, 학위 논문 구술 면접 이외에는 paper로 평가받는 걸로 알고 있다.
 
지금까지 경험한 바로는 토론보다 글쓰기가 더 중요한 상황이고, 그 글쓰기를 위해서는 독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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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신 시절 조교 자격으로 연구소에서 공부하다 보니 교수와 학생들 사이에서 "xxx파"(좌파, 우파 아님)라고 분류되었다. 당시에는 신경을 안 써서 그러려니 했는데, 세월이 지나갈 수록 내가 교수님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논문 지도 교수의 영향력은 남다르다 싶다.
 
영국 학교 인문학 박사 과정에서는 입학 후 바로 논문을 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robationary Review는 학생이 박사 과정을 진행할 역량이 있는지 점검하는 과정인 동시에 논문 초기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몇 개월 간 지도 교수와 교류하면서, 이전까지 경험한 교수와 학생 사이의 관계를 넘어서는 상호작용을 경험하고 있다. 수업이든 자율 연구(independent study)든 교수의 평가가 압도적으로 중요했다. 그 중요성은 박사 과정에도 적용되지만, 학생의 의견이 상당히 중요해진다.
 
내 경험에 의하면, 지도 교수는 학생에게 정답을 알려 주지 않는다. 최대한 학생의 주장과 근거를 존중하면서, 자신의 반론이나 생각을 남긴다. 그에 대한 수용 여부는 전적으로 학생의 몫이다.
 
내 생각에 지도 교수와 의견 차이가 발생했을 때 해결 과정이 중요해 보인다.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견지해서 지도 교수와 심사 위원들을 설득할 수 있다면 그 길을 선택해도 된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현격히 낮을 것이다. 보통 이 길을 선택할 경우 박사 학위를 마치지 못하는 사례가 많았다.
 
지도 교수의 견해를 전적으로 수용해도 한다. 안전한 길이지만, 학생이 스스로 답을 찾는 과정을 갖지 않고, 지도 교수의 의견을 수용하는 수동적 태도는 좋은 평가로 이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자신과 지도 교수의 견해 차이를 인지하고, 자신 스스로 둘 사이의 간격을 줄이는 방법이 있다. 학생에게는 의견 차이만큼이나 긴 고민의 시간을 가져야겠지만, 아마도 지도 교수는 학생을 높게 평가하지 않을까 싶다.
 
영국 학교에서는 지도 교수를 조언자(advisor)라고 지칭한다. 학생은 연구자로 대우한다. 이전까지는 교수들의 수업을 이해하면서 희열을 느꼈다면, 지금은 내 연구를 가지고 지도 교수와 협업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성취감을 느낀다.
 
왜 영국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분들이 지도 교수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충성도를 보이는지 조금 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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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글은 없다

성찰 2021. 11. 14. 23:15
1. 예상만큼 글이 써지지 않는다.
2. 구상과 글의 방향은 다르게 흘러간다.
3. 중요한 영감은 마감일 전에 떠오른다.
4. 새로운 아이디어를 글에 다 적용하지 못한다.
5. 결국 마감일에 쫒겨 제출한다.
 
더이상 글 쓸 일이 없을 때까지 무한반복할 루틴이 아닐까 싶다. 매번 아쉬운 마음이 크지만, 긍정적인 부분을 찾아 보면 두 가지 정도가 있지 않을까.
 
1.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
2. 차후 연구 주제가 생김
 
목표 기한 내에 박사 과정을 끝내려면, 좀더 각 잡고 집중해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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