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아직도 이사야의 고레스 예언을 고민하고 있다. 애초에 박사 과정에서 이사야의 목자 은유를 별도로 다루려고 했는데, 에녹 1서의 동물묵시록에서 중요한 논증을 차지할 듯하여 신중하게 다루고 있다. 비록 1년 동안 연구가 지체된 감이 없잖아 있지만, 고레스 예언을 통해 이사야와 동물묵시록의 목자 은유를 동시에 다루었으니 전체적으로는 진일보한 감이 있다고 생각한다.

고레스 예언을 보면 그 자체로 의문스러운 지점이 한둘이 아니다. 정복자 이방 왕 고레스는 하나님으로부터 "내 목자"이자 "야웨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 일컬어진다. 고레스 예언은 다윗 언약을 기반으로 다윗 계열의 왕이 등장한다고 믿었던 고대 이스라엘의 신념에 어긋나며 그들로부터 반발을 받는다. 정복자의 신을 추앙했던 고대 근동 지역의 관습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고레스는 마르둑을 칭송했으며, 야웨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설령 고레스의 아들 캄비세스가 이집트 정복 이후 그들의 신 레(Re)의 아들로 불리웠다는 기록은 있어도, 패전국의 신 야웨가 고레스를 세웠다는 예언은 상식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이사야의 고레스 예언은 이전 관습을 뒤집는다. 그 근거는 야웨가 창조주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패전국의 신이 창조주라는 선언은 청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결국 하나님은 "스스로 숨어 있는 자" 그리고 "이전부터 그것을 알게 한 자"라는 양면적 속성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예언들, 실질적으로 다윗 계열의 후손이 아니더라도 이방 왕을 통해 그같은 업적을 성취하실 수 있다는 전환적 사고를 가진 자들만이 이사야의 고레스 예언을 믿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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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중요성

성찰 2021. 10. 29. 01:56

근래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나를 공부 잘 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고, 주변에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좋은 결과를 내왔을 뿐이다.

 

학업에 한정해 말하자면, 난 웨신 시절부터 지금까지 좋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났다. 내가 20대 중반에 막내로 신대원에 들어가서 누님과 형님들이 잘 챙겨주셨고, 교수님들이 짱구 안 굴리고(사실 못 굴리고) 열심히 하는 내 모습을 좋게 봐주셔서 귀한 기회를 주셨다.

 

그외 공부 방법, 유학 준비와 진로 설정 등을 기회가 될 때마다 전수해주셨다. 난 그저 실천했을 뿐이다.

 

한국 귀국 후 비상 시국 때문에 인사 드리지 못한 교수님들과 통화를 하는데, 나에게 도움이 되는 말씀을 많이 해주신다. 오직 교수님들만 내게 해주실 수 있는 조언들을 해주시니 현재 내 상황에 비추어 차후 계획을 설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나 이만큼 성장했으니, 선생의 중요성을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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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 우민화 목회

성찰 2021. 10. 25. 22:59

1. 부교역 시절 부임 초기 담임 목사님들은 나에게 "목회자는 목회에 집중해야 하니, 공부는 ThM까지만 하라"고 말씀하셨다.

2.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 QT나 제자 훈련 같은 프로그램은 돌려도, 성경 공부에 집중할 생각이 없다. 

3. 작년 말 A 교회에 3주 연속 강의를 나갔었다. 강의를 마치고 질의응답 시간에 B 장로님이 질문하셨다. "목사님은 박사 학위 취득 후 목회는 안 하실 거죠? 그럼 우리는 이런 강의를 어디서 들어야 합니까?"

4. 오늘 '성도들의 지적인 콤플렉스'라는 말을 들었다. 교회에 헌신하는 길이 주님을 위한 일이라고 담임목사와 부교역자들, 평신도 지도자들의 말에 순종했지만, 정작 성경은 제대로 모르는 현실을 마주한 허탈감이 읽혔다.

5. 성도는 목마르다. 하나님의 말씀에 목마르고, 신실한 목회자에 목마르다.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예측할 수 없는 앞날이지만, 내가 쓰임 받을 곳이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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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림의 미학

성찰 2021. 10. 22. 01:19

각주는 내 주장과 근거의 출처를 밝혀 주는 역할을 한다. 한편으로는 저자가 읽은 글의 양과 고민의 시간들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나는 자료 분석 단계에서 각주 표기에 누락이 없도록 인용할 만한 문장들을 페이퍼에 적어두고 바로 각주 처리를 해버린다. 각주들은 글을 쓰는 단계에서 적합한 위치로 옮겨지거나 끝내 자리를 찾지 못해 삭제되기도 한다.

 

남의 글은 내 문장과 결합력이 떨어진다. 투박하더라도 내 생각을 글로 옮겨야 문장 결합력이 단단해진다. 또한 나만의 관점이 생기면, 타자의 글은 이질감이 생겨 버려 융합이 어려워진다.

 

살리지 못할 인용은 버려야 한다. 타인의 권위를 활용하기 위해 각주를 살리려다 내 글이 죽는다. 불필요한 인용은 과감히 버려야 내 글의 가치가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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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에 미친 듯이 책을 읽던 시절이 있다. 당시 목표는 1년 100권이었고, 실제로 3년 동안 340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 요령이 없어서 정독을 했고, 권수를 채우려고 얇은 책을 끼워 넣지 않고 순전히 내 관심사에 의해 책을 결정하고 읽었다.

 

인터넷 서점이 서로 최저가 경쟁을 하던 시기이고, 블로그가 주목을 받았다. 출판사와 인터넷 서점에서 서평단 모집을 열심히 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책은 주로 도서관에서 빌리고, 서평 활동으로 책을 받아서 읽었다.

 

언제부터인가 서평이라는 걸 쓰지 않는다. 학교 과제물이거나 지도 교수에게 공부했다는 증거로 삼으려고 쓰기는 한다. 이외에는 막 떠오르는 생각이나 내 관심사와 관련해서 파편적으로 흔적을 남길 뿐이다.

 

내가 서평을 쓰지 않는 이유는 이렇다. 일단 내가 서평을 쓸 만큼 책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형식적으로 쓰자면, 책의 구성과 요약, 주요 기여 사항과 한계를 지적하면 되지만, 내가 진정 저자의 글을 이해하고 선행 연구와 현 학계 상황을 이해하고 있느냐로 이어지지 않는다. 가방끈이 길어질 수록 주요 저널에서 서평자 요구 조건으로 최소 박사 과정 학생 이상으로 제한하는지 납득이 된다.

 

다음으로 지적질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지적질 자체가 두리뭉실해서 실요성이 떨어지고, 내가 개떡 같이 말해도 저자가 찰떡 같이 알아들어서 다음 저술에 반영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내 지적은 그냥 지적으로 끝난다.

 

대안으로 저자가 되기로 했다. 어차피 학위를 받으려면 논문을 완성시켜야 한다. 중간 중간 소논문을 발표도 해야 한다. 앞으로 연구자로 길이 열린다면, 주기적으로 글을 써내야 한다. 내 관심사와 내 능력에 한해서 내 글로 말하려고 한다. 박사 학위를 받고 나면 서평 쓰는 능력도 많이 나아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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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브 시절부터 각주는 많아도 상관 없다고 배워서 인용은 무조건 각주 처리를 해왔다. 간접 인용이든 직접 인용이든 표기를 누락하지 않는 방법은 글을 쓰면서 바로 각주 처리해 버리면 된다.

 

박사 과정에서 글을 쓰면서 인용을 줄이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온전히 내 생각과 글로 채우기란 힘겹다. 특히 주해에서 그렇다. 주석가마다 다른 견해를 진술하는데다가, 나만의 독특한 관점을 갖기 이전에는 누군가의 진술을 가져다 써야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주해를 벗어나면 인용이 줄어들고 내 관찰과 주장이 많아진다.

 

이 부분은 자연스럽게 해결이 되리라 기대한다. 내가 직접 본문을 관찰하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누군가의 관찰에 기댈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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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연습

성찰 2021. 10. 19. 13:05

지금 페북의 용도 중 하나가 글쓰기 연습이다. 솔직한 감정과 내 아이디어가 담겨서 때로는 조심스럽긴 하지만, 유익이 더 많다고 판단해서 열심히 끄적인다.

페북에 글을 올리려면 완성된 문장이어야 한다. 대개 한번에 쓰는 글이라 오타나 문법 오류 등이 포함되지만, 문장을 완성시키는 훈련이 된다.

완성된 문장의 힘은 크다.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수 있고, 차후 수정을 통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내 페이퍼와 관련된 글은 더욱 그렇다. 페북에 올린 글은 하나의 아이디어로, 문장 그대로 활용되지 않지만 페이퍼 내에 다 녹아든다. 완성된 문장을 쓰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엉성한 틀이라도 완성되면 다 쓸모가 있어진다.

내 글은 언제나 전체공개이다. 이 말은 페친이 아니어도 누구나 내 글을 읽을 수 있다. 이 말은 누구나 나에게 댓글을 달 수 있다는 말이며, 때로는 태클이 들어 올수도 있다. 전체공개인 만큼 허투로 글을 써서는 안 되며, 최대한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려는 긴장감을 주는 효과가 있다.

한국인들은 대체로 글쓰기 훈련이 덜 되어 있고, 남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를 주저하는 성향이 있다. 하지만 영미권 학교에서 공부를 하려면, 그 관성을 깨야 한다. 훈련 방법은 자신에게 맞는 도구를 택하면 된다. 내가 택한 건 페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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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히 학위 취득에 목표가 있지 않다면, 학교를 다니면서 학습법과 교수법을 배울 수 있다. 대부분의 분야가 마찬가지지만, 스스로 이치를 깨우치는 천재가 아니면 누군가로부터 배워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면, 학교나 학원, 과외 등이 성행할 이유가 없다.

 

선생은 당연히 자신이 접근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전문가를 선택해야 한다. 이때 전문가의 교수 능력이 중요하다. 박사 학위가 그 분야의 독보적 위치를 가질 만한 능력이 검증된 자들에게 부여된다고는 하지만, 개인의 학습 능력과 교수 능력은 비례하지 않는다.

 

MDiv 학생 시절, 독일에서 지도 교수로부터 극찬을 받고 교수 시험을 보라는 권면을 받았다는 분이 강사로 왔었다. 내 기억에 그 분은 한 학기에 1/4 이상 수업 시간의 절반 이상을 한국말조차 제대로 못했다. 그 분은 다음 학기부터 볼 수 없었다. 희한하게 그런 분이 학점은 짜게 준다.

 

반면 학생들로부터 "조련사" 같다는 평가를 받는 분이 있었다. 강의는 깔끔하고 학생 스스로 실력이 늘어난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말이 들려 왔다.

 

서로 극단적인 사례들을 제시했으나, 흔치 않게 접할 수 있는 사례가 될지 모르겠다. 중요한 건, 교수라고해서 교수법이 탁월하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학생들은 가능하면 강의를 잘하는 교수들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 연구자로서 탁월한 기량을 가진 교수로부터 심오하게 새로운 내용을 배우는 보람이 있을 수 있으나, 그 실력이 강의로 전달이 안된다면 학생 스스로 넘어야 할 장벽이 커지기 마련이다. 학생의 입장에서는 개인의 연구 능력이 탁월한 교수보다는, 강의를 통해 개인의 생각과 학계 전반의 흐름을 잘 전달해주는 교수가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교회 사역을 병행해야 하는 신학생의 입장에서 교수로부터 배운 내용을 고스란히 교회 현장에 적용해야 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학습법과 교수법을 배울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결론은 독학을 하지 말고 학교에서 제대로 배우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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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류의 입장에서 글을 쓰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다. 주장과 근거가 확실하면 교수로부터 극찬을 받지만, 어쭙찮게 접근하면 본전도 못 뽑을 가능성이 높다.

보통 연구 주제를 선정하고 선행 연구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학계의 흐름을 파악한다. 이 단계에서 주류와 비주류 사이에서 자신의 입장이 파악되고, 더 나아가 선행 연구의 한계와 자신의 연구가 갖는 의미를 정의해야 한다.

선행 연구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왜 이 주장이 학계의 주류가 되었을까?' 싶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반대로 '왜 이 주장이 비주류가 되었을까?'라는 질문이 생기기도 한다.

주제별로 필독으로 꼽히는 책과 논문이 있다. 이런 부류는 보통 가장 처음 발표된 자료로 방향성을 제시하거나, 후대 자료이지만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거나 연구사에서 변환점을 만들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보통 후대 연구자들은 이런 글들을 먼저 접하므로, 자신의 연구를 통해 다른 견해를 제시하지 않는 한 큰 맥락에서는 유사한 흐름을 갖게 된다. 달리 말해, 선행 연구를 뒤집을 만한 주장이 대세가 되지 않는 이상 학계에서 대세는 더욱더 견고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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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을 읽는 이유는 다양하다. 나는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면서 선행 연구를 추적하기 위해 주석서를 읽는다. 

분석하는 주석의 종류가 많을수록 생각이 정리되지 않고, 오히려 더 복잡해진다. 복잡도가 증가할수록 본문 이해와 분석을 위한 시간이 많이 소요되면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지치게 된다. 힘겨움에 비례하여 투정(혹은 빡침)도 늘어난다. 작가들은 집필자장애(writer’s block)라는 현상을 겪는다고 하는데, 나는 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일종의 정체 구간에서 허우적거린다. 글은 안 써지고, 아이디어는 진척을 이루지 못하니 답답함만 더해간다.

이 같은 현상에 빠지는 이유가 있을 텐데, 내 견해와 동일한 혹은 비슷한 선행 연구를 찾지 못해서 그러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납득할 만한 선행 연구를 찾지 못했다고 해야 할까?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한몫 할지도 모른다.

이 정체 구간에서 헤어나오려면, 어떻게든 글을 쓰고 다른 자료를 읽고 분석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이미 읽었던 자료를 다시 읽어봐야 한다. 글을 고쳐 쓰고, 각주 자료가 하나둘씩 늘어나면서 완성된 문장이 늘어나고 문단이 만들어진다. 그림 전체가 그려지고, 세부적인 글이 조금씩 풀어 헤쳐지면서 그럴듯한 문장들로 채워져 간다. 결국 글은 고민의 집합이다.

다행이라면 성서학자는 어떤 의미에서 창작의 고통을 겪을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는 성경과 고대 자료, 선행 연구가 주어져 있다. 기존 자료를 퍼즐 조각이라고 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은 기존 조각들을 재배열하고, 때로는 조각을 새로 만들어서 가장 완벽한 퍼즐을 맞추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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