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가방끈이 길어질 수록 내 강점과 약점이 확실해진다. 그 중에서 약점까지는 아니지만, 내가 두 차례나 지적 받는 것이 하나있다. 한 번은 CTS 시절, 다른 한 번은 최근에 받았다.

 

그것은 바로 선행 연구에 관한 부정적인 평가에 기인한다. 대략 20년 정도 신학을 공부하면서 생긴 나만의 전제들 그리고 선행 연구를 분석하며 내적 확신을 얻게 되는 가정들이 역설적이게도 나에게는 지적으로 돌아온다.

 

나는 유독 "사후예언"이라는 용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몇 년 전, 페이퍼에 "안타깝게도 현 학계에서 사후예언을 인정하는 듯한 경향이 있다"고 썼다가, 이같은 부정적 논조는 불필요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최근에는 "안타깝게도 A의 연구가 한 쪽으로 치우져 있다"고 썼다가, "왜 그게 유감스럽지? 더 분석해서 비평하라"는 조언을 받았다.

 

내 스스로는 확신이 서겠지만, 교수의 입장에서 유감스럽다는 내 평가는 불필요한 혹은 감정적인 평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지점이 나를 당혹스럽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학자의 태도와 책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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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 학위는 독립적인 연구를 진행할 수 있다는 자격증이다. 학위 수여를 통해 독립 연구자로서 인정을 받는 동시에 학위 논문을 통해 선행 연구와 다른 독창적 견해를 학계에 내놓게 된다.

 

박사 과정 일년 차를 꽉 채워가는 지금 학자로서 다른 주장을 할 수 있다는 것, 그 특권이 홀로 기나긴 인고의 세월을 버텨온 자에 주어지는 권리임을 체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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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를 위한 글을 쓰는 저자로서 독자에게 선행 연구를 얼마나 소개해야 할지 가늠이 잘 안된다. 여기서 내 일차 독자는 지도 교수님이시고, 이차 독자는 평가 위원회 심사 위원 두 분이다.

 

당분간 내 독자는 지도 교수님을 비롯해서 신학과 교수진 중 일부에 한정된다. 모두 개인의 영역에서 최고점에 계신 분들이고, 내가 다룰 영역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내공을 갖추고 있으시다.

 

그런데도 선행 연구를 반박하거나 내 주장을 펼치기 위해서는 독자들이 평가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전문가들도 처음에는 내 글만 읽기 때문에, 그들이 외부 자료를 참조하지 않고 내 글만으로 선행 연구와 내 주장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가끔씩 내 주장에 함몰되어 충분한 자료를 제시하지 못하거나 감정적인 어휘를 사용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학자는 글로 말하는 사람이다. 언제나 침착하게 글로 내 생각을 보여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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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에 위치한 웨신은 성서주해 과정으로 총원의 50%을 수용하는 독특한 구조를 가진 학교이다. 월요일이면 재학생의 60% 이상이 등교하여 수업을 듣느라 학교가 시끌벅적했다. 화요일부터 목요일은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금요일부터 주일은 한적할 정도였다.

 

내가 MDiv 과정일 때에는, 석박사 과정 학생분들이 유일한 휴식일인 월요일에 학교에 나오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떤 분들은 왕복 5시간 이상을 도로에서 보내기도 하셨다. 내가 석박사 분들과 수업을 들을 때, 몇몇 분들은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졸기도 하셨다. 전임 사역하느라 피곤할텐데 왜 학교에 나올까 싶었다.

 

그 분들이 말하시길, 월요일 수업을 통해 3편 가량의 설교감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수업이 아니면 도통 책을 읽을 시간 조차 없다고 하셨다.

 

어쩌면 전임 사역자의 처지는 다들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교회에서 교역자들이 설교 준비할 시간도 확보하기 쉽지 않을 만큼 바쁜 나날을 보내게 하지 않을까.

 

내돈내공(내 돈 주고 내가 공부한다)라는 구실이 있어야, 최소한 월요일에는 이런저런 일로 교역자를 안 부르지 않을까 싶다. 대심방 기간에는 다들 어쩔 수 없이 빠지시더라.

 

학자금이 부담스러워서 학교보다는 독학을 택하는 경우가 있다. 돈은 아주 중요한 요소라서 개인의 의지와 환경이 뒷받침된다면 이런 선택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효율적인 면에서는 학자금 대출을 받아서라도 학교에 다니는 쪽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보통 사람은 강제성이 없으면 느슨해지는 경향이 있다.

 

내 입장에서는 사실상 독립 연구나 다름 없는 영국 박사 과정에 터무니 없이 비싼 학자금을 내야하는 현실에 빡쳐 오르지만, 매달 청구되는 분할 납부금을 보면 오늘도 열심히 끄적거리게 된다.

 

만약 공부는 하고 싶고 재정적으로 여건이 된다면 본인의 관심사에 부합하고 우수한 교수진을 확보한 학교에 다니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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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과 외경

성찰 2021. 3. 29. 19:27

정경 형성사는 기독교 신앙 공동체에서 "정통"(orthodoxy)으로 분류되는 주류 신학을 분석하는 자료가 되는 동시에 교회 분열을 야기한 "이단"(heresy)의 사상을 반추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한참 제2성전기 문헌을 탐독하고 있어서 외경에 관한 통찰력이 부족한 상태이고, 스스로 정경 신학을 정립하는 과정이라 이 주제를 다룰 시점은 아니다.

 

다만 이 시점에서 두 가지 전제는 확실히 밝힐 수 있다.

 

첫 번째, 정경과 외경 사이에 확실한 이질감이 존재한다.

두 번째, 정경 내 신학적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사이를 묶어주는 내적 일치성이 있다.

 

나는 고대 유대인들과 초기 유대 기독교인들이 향유했을 사상을 추적하면서 칠흑 같은 어둠 가운데 촛불을 들고 걷는 듯한 기분을 자주 느낀다. 동시에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이자 하나님과 인간의 교통의 흔적이며,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질문에 답을 얻어가는 과정이라는 확신을 하게 된다.

 

앞으로 제2성전기 문헌을 더 들여다보고, 성경 전체의 흐름을 관통한 후에야 정경과 외경의 차이를 논할 수 있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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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자료를 검토하다 보면 저자의 주장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동일 주제 내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만약 복수의 자료를 검토한 후에도 차별점을 갖는 저자나 주장을 찾지 못했다면, 본인의 자료 수집과 수용력을 의심해봐야 한다. 특정 집단의 자료만 검토하지 않는 이상 단일 견해로 수렴될 가능성은 전무하다. 아니면 본인의 독해력이 문제일 수도...

특정 주제에 관해 여러 주장이 존재하더라도 통용되는 견해는 2~3가지 정도로 정리된다. 당연히 그 이상일 수도 있다. 연구 방향성을 빨리 잡으려면 자료 검토 단계에서 학계의 주장을 잘 정리한 자료를 최대한 빨리 찾아서 반복적으로 읽어서 틀을 잡아둘 필요가 있다. 일차적으로는 주장 별 근거를 숙지하고, 다음에는 반복적으로 읽어서 견해 별로 진술하는 방식을 습득해야 한다.

만약 세부적인 자료를 찾기 쉽지 않다면, 독자 스스로 비교 분석을 해야 한다. 당사자에게는 힘겨운 작업이겠지만, 달리 말하면 학계에서 연구가 덜 진행되어 앞으로 집중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의미가 될 가능성이 있다.

기존 견해를 잘 다룬 자료라 하더라도 독자 스스로 선행 연구를 정리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능력이 바로 '핵심파악'이다. 저자별 핵심 주장을 정리하면, 쉽게 '비교 분석'을 할 수 있다. 비교 분석을 하고 나면, 특정 주장에 손을 들어주거나 본인이 새로운 주장을 개척할 수 있게 된다.

교수가 학생에게 가장 많이 요구하는 과제 중 하나가 바로 비교 분석일 거다. 칼빈 재학 시절 한인유학생의 사례를 참고해 보면, 학생이 교수에게 연구 주제를 문의하면 교수는 A와 B를 비교해보라는 말을 해준다고 한다. 가령 조직신학 전공으로 <성령론> 수업에서 소논문 주제를 찾고 있다면, "A와 B의 성령론 비교 연구"가 연구 주제로 잡으면 된다. 내 경우 "Reading John 7:37-39 in light of Zechariah 14"란 주제로 쓴 페이퍼를 게리 버지 교수의 <요한복음> 수업 과제로 제출했다. 이 글은 요한복음 7:37-39의 구약 본문으로 제시되는 각 구절을 비교하고, 스가랴 14장이 그 배경이라고 주장한 글이다. 이런 식으로 비교 분석은 가장 흔하면서 가장 효과적인 연구 방법이다. 때로는 쉬운 작업으로 과소평가될 수 있지만, 비교는 각 주장의 독특성을 분별하는 수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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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저자와 독자가 책이란 매개체로 간접적인 소통을 하는 행위이다. 저자는 독자를 향한 저술 목적이 있으며, 본인의 의도에 부합한 이해를 갖기를 희망한다. 때로는 독자의 반응을 저자의 저작물에 반영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저자는 전달에 중점을 둔다.

지식 축적 과정에서 핵심 파악 능력이 중요하다.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독서는 저자가 저술을 통해 의도했을 독법을 배제하고, 독자의 일방적인 수렴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학계에서는 '독자반응비평'이라고 해서 저자의 의도보다 독자의 이해에 더 강조점을 두기도 하는데, 나는 여전히 대세는 저자의 의도를 중요하게 간주한다. 저자의 입장을 고려할 때, 독자반응비평은 효용 가치가 떨어진다는 게 내 입장이다. 혹여나 독서의 목적이 여가 선용이라면 별문제가 없겠으나, 지식 축적이나 활용에 있다면 큰 문제를 낳는다. 독자는 시간과 양이 아닌 질에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 또한 거대 담론이나 지엽적인 서술이 아닌 핵심 파악에 집중해야 한다. 각 문단의 핵심이 쌓여 책 한권을 꿰뚫게 된다. 국어 시간에 문단마다 핵심 주제를 찾는 훈련을 하는 이유가 있다.

상위 과정으로 올라갈수록 독서량은 압도적으로 늘어난다. 당연히 정확한 이해는 필수이다. 소논문 수준의 과제를 해야 한다면, 최소 10권 이상의 책을 읽을 텐데, 책의 핵심을 파악하고 있다면 손쉽게 인용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각 책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면 인용할 때 낭패를 본다. 실제로 학계에서 저자가 새로운 주장을 전개하는 방식은 기존 해석의 결함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 교수로 활동하고 있더라도 주요 논지를 잘 못 파악해서 다른 학자로부터 학술적으로 두들겨 맞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강의마다 강사가 의도하는 방향이 있다. 수업 교재는 그 방향성에 가장 부합한 책이거나 서로 보완해주는 역할을 한다. 강의와 별도로 학생이 오랜 시간 고민해야 할 주제가 있다면, 강사는 서평이라는 과제를 부여하는데, 교수 입장에서 요약이나 서평은 학습자의 이해를 가늠하는 유용한 수단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대학원 과정까지 요약이나 서평 과제는 10쪽 내외로 주어진다. 요약이라도 1장 정도는 개인의 견해를 쓰도록 한다.

3년 정도 대안학교에서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북 포럼을 진행한 적이 있다. 1년 반 정도는 독서 토론으로 진행하고, 나머지는 글쓰기 훈련을 했었다. 그때 경험에 의하면, 요약이나 서평만으로 학생이 성실히 과제를 수행했는지, 얼마나 많이 고민했는지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내 의도대로 책을 읽었는지 점검해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요약과 서평이 좋은 훈련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초급 단계에서는 각 분야에 관한 이해도가 떨어져서 책 한 권 소화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점차 동일한 시간에 더 많은 책을 읽고 소화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초반에는 직접 인용이 많겠지만, 점차 재진술(paraphrasing)과 간접 인용을 늘려야 한다. 학습자는 점차 요약 분량을 줄이는 훈련을 하면서 간접 인용도 줄이는 훈련도 해야 한다.

지난한 훈련이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기본에 속한다. 예를 들어 논문에서 연구사가 곧 요약이다. 중요도에 달려 있지만, 서론 단계에서는 몇 줄 정도로 압축해서 다룬다. 최소 소논문 하나, 최대 책 한 권 분량을 단 몇 줄로 진술할 수 있어야 한다. 비록 쉬운 작업은 아니지만, 핵심을 잘 파악하고 있다면 저자 재량껏 분량을 조절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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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요한복음과 제2성전기 문헌을 다룬 자료를 읽는다. 자료들을 읽을수록 내 머릿속에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열심의 근원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단순히 오늘날보다 고대 사회가 종교와 더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고대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종교 혼합주의와 실질적인 배교자들이 가득했다.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를 꾸짖었던 이유, 다니엘서 저술 목적을 생각해 보자.

또한, 고대 유대인들은 현대인과 다른 사고방식을 가졌음을 확신하게 된다. 제2성전기 문헌만 봐도 고대 유대인들은 역사적 사실이라는 개념에 철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상상력을 공유하는 데 거부감이 없었다. 그들이 사실 그 자체보다 중요하게 간주한 건, 실제 역사적 사건이 갖는 의미와 그것을 바탕으로 한 메시지에 있다.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해 유대교와 기독교를 비역사적 종교로 인식하는 부류가 발생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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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창의력이 중요하다는 말을 들어왔다. 국민학생 시절 변신 자동차처럼 어린이가 볼만한 주제를 다룬 과학 잡지를 구독하고, 피아노 학원과 글짓기학원에 다닌 기억이 있다. 분명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어머니의 교육열이 작용했다고 본다. 직접 물어 본 적은 없지만, 주위에서 창의력 증진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듣고 반영한 결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 교육 과정에서는 암기력과 임기응변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일반화할 수 없지만, 내 세대는 누가 더 많이 문제집을 풀었느냐로 대학이 결정되고, 선배로부터 족보를 확보했느냐로 학점이 달라지는 현실에서 '창의력'이 자리 잡을 곳은 없었다. 신대원에서 목회학 석사 과정 3년을 거치는 동안 빡빡한 학점 이수로 버거운데, 교회 사역을 병행하노라면 공부와 친해질 기회를 얻기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신대원을 마치고 교회에서 3년 정도 사역하다가 석사 과정에 진학하는 이유는 대부분 공부의 필요성을 느껴서이다. 좀 더 도전해서 유학 가는 시기이기도 하다.

내가 미국 칼빈 신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영국 박사 과정 진학을 준비한 경험과 3년 동안 한인 유학생들과 교류하면서 독창적 사고란 무엇인가, 직설적으로 말하면, 교수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한 글쓰기가 무엇인지 고민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지금은 박사 과정을 진행하고 있어서, 당장 급한 일은 아니지만, 나에게 당면한 과제이기도 해서 독창적 사고법을 고민하고 있다.

독창적인 사고의 시작, 지식 축적

독창적인 사고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학습자는 교수의 강의, 논문이나 글, 대화나 사색을 통해서 아이디어를 얻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람마다 선호하는 방식이 있겠지만, 내 생각에 독서만큼 타인의 지식을 빨리 흡수하는 방법은 없다. 학문의 세계에서 주장과 반박의 근거는 자료인데, 자료 분석이 곧 독서 행위이다. 모순적으로 들리겠지만, 독창적인 사고는 선행 연구 분석, 특히 연구 역사와 현재 논의 파악에서 시작한다.

이런 맥락에서 독창적 사고의 기반은 다독(多讀)이라 할 수 있다. 독서량이 많다고 자연스럽게 독창적인 사고 능력을 갖추게 되지는 않는다. 독서량에 비례해 저장된 정보는 많겠지만, 정작 중요한 해석 능력은 별개의 영역이다. 그래서 이 '많다'는 의미를 독서량으로 한정하지 말고, 폭넓음을 가미되어야 한다. 내 생각에 이것은 기본 중 기본이다. 이 토대 위에 자신의 생각을 추가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삼박자가 이뤄지면 적정 시점에 빛을 보는 때가 온다.

내 전공인 신약학(New Testament Studies)에서는 진영과 방법론에 따라 다양한 주석 시리즈가 존재한다. 대표적인 시리즈로는 Anchor Yale Bible (AYB), Hermeneia (HERM),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NIGTC), Pillar New Testament Commentary (PNTC), Word Biblical Commentary (WBC) 등이 있다. 불과 몇십년 전만 해도 어느 주석을 선호하느냐에 따라 신학적 성향을 판가름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보수 진영에서 AYB와 HERM는 자유주의 진영에서나 보는 책으로 여겼다. 지금은 모든 자료를 공평하게 대하는 추세가 확산하고 있어서, 예전과 같은 잣대를 들이대지는 않는다. 내 경우 목회학 석사 시절부터 잡식으로 자료를 접하려고 노력했는데, 예나 지금이나 AYB와 HERM는 종종 까끌까끌한 느낌을 받는다. 둘 다 언어학적 분석과 역사 비평 등 방법론으로 풍부한 배경 자료와 색다른 본문 해석을 제시해 주지만, 가끔 저자의 전제와 주장에 내가 반감을 들게 되곤 한다. 그런데 나는 이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료 분석 과정에서 폭넓은 관점을 접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내적 갈등이 증폭되면서 이질감으로 인한 반감이 반강제적으로 내 사고의 폭을 넓히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신학이란 학문과 신앙이 결부된 영역이라 순전히 특정 주장에 동조 혹은 거부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최대한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자료를 분석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기존 자료에서 놓치고 있는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학계 기여도는 기존 연구의 허점을 연구자가 제시하는 주장의 세밀함과 보완의 범위에 따라 결정되므로, 나는 내적 갈등을 글로 표현하여 학계의 빈틈을 메워주면 된다. 만약 내가 불편한 감정으로 인해 그 자료들을 덮어버렸다면, 나는 교수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을 소지가 다분하고, 나만의 논리를 만드는 실력을 배양하지 못한 채 특정 진영에 갇힌 신학자로 성장했을지 모른다. 아, 아직 난 학생이다.

독창적 사고를 위해 필요한 지식량이 얼마나 되는지 답해 줄 수 없다. 상황에 따라 쉽게 발견되기도 하고, 제아무리 깊게 파도 아이디어조차 떠오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설령 아이디어를 발견해도 그 가치를 파악하지 못해 놓쳐 버리는 경우도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아이디어를 검증해 줄 사람을 찾을 필요가 있다. 내 경우 목회학 석사 학위 논문 주제는 지도 교수의 강의에서 포착했고, 신학 석사 학위 논문 주제는 고 그랜트 오스본(Grant Osborne) 박사의 BECNT 요한계시록 주석을 읽다가 발견했다. 내가 여러 선택지를 가지고 교수와 상담을 요청했으나, 나는 각 주제의 가치를 가늠하지 못했으며, 둘 다 지도 교수와 대화를 거쳐 최종 주제가 결정되었다.

독서량에 관한 내 경험을 말하자면, 한때 연간 100권 이상의 책을 읽던 시기가 있었다. 한창 절정일 때 3년 동안 400권에 가까운 책을 읽었는데, 분야는 자기계발, 경영, 경제, 신학 등 다양했다. 글쓰기 연습 겸 생각 정리를 위해 글을 쓰고 여러 경로에 공유하기도 했다. 독자의 반응이 괜찮았는지 몇몇 전문 기관으로부터 기고 요청을 받기도 했다. 이때가 20대 중반이었다. 그 무렵 서평단 활동도 열심히 했었다. 출판사의 요구대로 서평이나 후기를 남기기도 했고, 그와 별개로 기록 차원에서 글로 남긴 것도 많다. 신대원 과정에서 수업 자료 이외에 많은 자료를 읽었으나, 독서량이 성적과 정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교훈을 얻었다. 어떤 과목은 재치를 발휘해 짧은 시간을 들이고 좋은 평가를 받기도 하고, 어떤 과목은 학기 중 상당 시간을 할애해도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성적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개인은 노력과 성적을 통해 적정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감을 잡아야 한다. 이게 정말 어려운데... 달리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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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창성은 훈련으로 계발할 수 있는 능력이다. 우리는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격언을 알고 있다. 독창성 계발을 위한 방법은 다양하지만, 신학 전공으로 이 주제를 접할 기회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경우 논문 작성법이란 과목 이외에 독창성이란 주제를 다룬 수업은 없었다. 신학교가 교단을 모태로 한다는 특수성을 가져서 그런지, 교단과 교수의 입장을 얼마나 잘 계승/답습하느냐로 평가하는 분야가 신학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설령 독창성을 중요시해도 학습자가 습득해야 할 기초 지식이 방대해서 박사 과정 학생도 끊임없이 선행 연구와 씨름해야 한다. 이러한 현실적 제약이 인정하더라도, 독창성을 중요시하는 문화는 엄청난 효과를 가져온다.

 

독창성을 중요시하는 문화

웨신은 독특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모태가 교단이 아니다. 게다가 대학원대학이라는 형태를 갖고 있어서, 학부에서 대학원으로 이어지는 끈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학교는 생존을 위한 경쟁력 확보를 위해 성경 주해를 주력 분야로 내세웠고, 교수들은 교리나 특정 신학을 강조하지 않고 학생의 창의력을 권면하는 분위기를 유지했다. 그래도 교수진이 합동, 합신, 고신 등 보수 교단 출신이라 암묵적 동의라는 게 존재했다. 비록 교수와 학생 사이에 견해 차이가 있다 해도 논리적 설득력이 있다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고 기억한다).

 

최신 연구 방법론에 능숙한 교수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목회학 석사 과정에서 본문비평, 내러티브, 텍스트 언어학 등을 배운 덕에, 박사 과정 지원을 위한 연구 제안서를 준비할 때 연구 방법론을 채택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지 당시에는 겁 없는 도전이라 고생을 꽤 했다. 최근 연구 주제와 관련된 자료를 읽다 보면, 가끔 신대원 시절 교재였거나 과제였던 자료를 다시 보게 된다. 당시에는 열심을 냈으나 교수들의 수준 높은 강의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 놓친 부분이 많았음을 깨닫고 있다.

 

문화라는 측면에서, 나는 특혜를 받았다고 인정해야 한다. 대다수가 그렇듯이, 나는 독창성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한국 신대원 석사 과정 시절부터 평소 궁금증을 연구 주제로 발전시키기보다는, 글을 읽으면서 의문을 제기하거나 흥미를 유발하는 주제를 연구 과제로 선택했었다. 간단히 말하면 평소 궁금한 게 없었다는 말이다. 더구나 애초에 성경 본문에 충실한 설교자가 되려고 공부에 매진했기에, 독창적인 사고보다는 바른 해석을 숙지하는 데 힘썼다. 강의나 글을 이해 못 하면 바로 질문을 던지지 않고, 내 머리 탓을 하며 혼자 골몰해서 답에 도달하려고 애썼다. 옛말에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웨신에서 5년가량 공부하면서 그 문화에 젖어 한국 사회, 특히 교단 신학교의 현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만난 타 교단 학생들과 교류하면서, 내가 예외적인 환경에서 공부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나와 대화를 나눈 유학생들은 한결같이 연구 주제 선정과 자기주장을 힘겨워했다. 신학 분야에서는 보통 목회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유학길에 오르는데, 교단 사역자가 되기 위해 3년 동안 주입식 교육을 받는다(한국 교육 자체가 주입식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최소 19년!). 현지 생활 적응부터 쉽지 않은데 과목마다 교수가 "내 생각이 뭐냐?"고 물어대니 한인 유학생들은 벙찌게 된다. 교수의 질문은 학생에게 생각의 지평을 넓히도록 자극을 주지만, 이러한 훈련을 받아본 적 없는 한인 유학생은 맨땅에 헤딩하듯이 새로운 학습법을 익혀야 한다. 한국에서 신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이들은 별 어려움 없이 대처했는데, 그들도 한국에서는 바닥부터 기어 올라와서 요령이 생긴 것일 뿐 처음부터 남다른 비법을 갖고 있는 게 아니었다. 나만 해도 웨신에서 공부하는 5년 동안 매 학기 맨땅에 헤딩했다. 독창성을 중요시하는 학교의 문화는 혜택인 동시에 치열한 싸움이었다. 그렇다고 미국 유학 생활이 수월했냐고? 요령껏 대처했을 뿐 정말 고생 많이 했다.

 

칼빈 신학교(Calvin Theological Seminary)에서 처음 알게 된 제도인데, 미국 학교에는 "independent study" 제도가 있다. 이와 관련해 Calvin College(현 Calvin University) 재학생과 대화한 적이 있는데, 대학에도 해당 제도가 있다고 한다. 보통 4학년이 졸업을 앞두고 취업이나 대학원 진학 준비로 선택하는데, 학점 이수가 쉽지 않아서 수업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나는 이 제도의 혜택을 많이 봤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수업을 선호하지 않게 되었다. 짐작건대 미흡한 영어 실력이 큰 몫을 했다. 교수의 말은 제아무리 집중해도 20%가량 들리는데, 나머지는 소리의 파장이 귀 주변에서 맴돌며 상상력을 자극할 뿐 당최 이해되지 않는다. 교수가 느닷없이 질문할까 긴장하다가 당황하며 반응한 적도 있다. 다행히 성적에 영향을 미칠 만한 실수를 한 적은 없다. 무엇보다 교수의 강의안을 외워서 시험을 치른 경험은 대학원 과정에 대한 회의감이 들게 했다. 전략상 미국 석사 학위 취득 후 영국 박사 과정에 진학하려고 했기에, 샘플 페이퍼와 연구 제안서를 준비하려고 independent study를 선택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연구 주제 선정부터 페이퍼 제출까지 전 과정을 자기 주도적으로 진행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만큼 성과가 컸다. 강의를 듣지 않으니 수업료가 아깝지 않냐고 하는 주변 사람들의 질문이 있었는데, 단언컨대 독창성을 훈련하고 내 학술적 역량을 극대화하는데 independent study만큼 유용한 제도가 없다고 할 만큼 후회가 없다.

 

게리 버지(Gary M. Burge) 교수와 인연은 내게 중요한 경험이다. 버지 교수는 타고난 강연자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유머러스하고 친근한 사람이다. 학문적으로는 고 하워드 마샬(I. Howard Marshall) 박사의 제자라는 자부심이 있다. 그는 기독교계의 하버드로 불리는 휘튼대학(Wheaton College)에서 25년 동안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그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나는 의도하지 않게 그와 다른 주장을 하는 페이퍼를 두 번이나 제출했는데, 매번 논리적 타당성이 있다면서 "A"를 주는 포용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격려와 강력한 추천서 덕분에 영국 대학교 박사 과정 진학 문의 과정에서 내가 관심을 가진 대부분의 학교에서 긍정적인 대답을 받을 수 있었다.

 

내가 박사 학위 취득을 위해 영국 학교를 선택한 결정적 이유는 이곳이 학생의 '독창성'을 높게 평가한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입학 절차에서 의무로 수강해야 하는 과목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고, 지도 교수와 대화를 해봐도 학생에게 독창성을 요구한다는 게 확연히 느껴진다.

 

문화의 힘은 크다. 독창성을 타고났다면 모를까 개인의 의지와 노력으로 독창성을 훈련하기란 한계가 있다. 그러나 문화는 개인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학점이라는 변수를 고려하면, 반강제적 요인이 있다고 쳐도 말이다. 혹여나 독창성을 훈련하고 싶으나 마땅한 환경을 갖추기 쉽지 않다면, 외부적으로 독창성을 자극하는 환경에 자주 노출하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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