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요한복음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예수의 죽음을 통한 대속 사역을 말하는 동시에 차후 요한공동체에 닥쳐올 (이미 현실로 마주하고 있는) 요한공동체의 수난을 암시할 수 있다.

21: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여기서 목자-양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 독특하게도,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과 마찬가지로, 목자의 죽음을 진술하고 있다.

두 구절은 예수의 죽음 이후 초대교회, 좁게는 요한복음의 청중들이 마주하고 있는 수난을 담은 본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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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예수께서는 일관적으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가르치셨으나, 청중들은 도무지 믿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도리어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이적을 베푸는 메시아에 대한 환상이 커져만 간다.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이 구절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예언된 다윗의 후손, 즉 다윗 계열의 메시아(Davidic Messianism)로 간주했다는 증거가 된다. 유대인들은 여전히 자신이 믿고 싶은대로 사건을 해석하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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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선한 목자 담론'으로 일컬어지는 요한복음 10:1-21에 이어 10:22-42에도 목자-양 은유가 사용된다.

예수께서는 앞서 강도와 목자의 구분, 목자의 희생 등을 가르치셨고 (1-18절), 유대인 사이에 벌어진 분쟁(19-21절)이 벌어졌다. 이 분쟁에 대한 답을 얻으려는 일부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확답을 얻고자 질문을 던지고 예수께서 대답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22-42절).

유대인의 질문은 "당신이 ...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24절). 요한복음은 모세와 율법 등을 전면에 내세우고, 다윗 계열의 메시아 사상(Davidic messianism)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새로운 다윗의 등장이라는 사상을 통해 군중이 기대하게 되는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상을 배제하려는 의도가 크다. 아마도 이 '그리스도'라는 언급은 오랫 동안 예언되어 온 다윗의 후손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다. 당시에는 누구든지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해도 종교 심판을 받지는 않았다.

예수는 유대인들의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의 불신앙을 지적하신다(25절). 더나아가 목자-양 은유를 사용해 그들이 자신의 양이 아니라고 지적하신다(26-27절).

그리고 다시한번 목자-양 인유를 통해 예수와 유대인들 사이의 관계를 정립하신다. 예수는 신앙의 대상이시며, 우리는 그를 따르는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유대인들과 예수 사이에 어긋한 대화는 유대인들이 원하는 것, 즉 로마로부터 이스라엘 독립을 이룰 군사적 메시아(24절)와 예수의 긍극적인 사역, 즉 영생을 주는 것(28절) 사이에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이 관계로 예수께서 답을 마치신다(28-30절).

여기서 배경으로서 '수전절'(22절)을 이해해야 한다. 요한복음에서 절기는 문맥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수전절에 관해서는 구약과 중간기 문헌을 살펴봐야 하는데, 여기에서는 짥막한 인용으로 대신한다.

"수전절의 제정은 제1마카비서 4:59에서 묘사된다. ... 그런데 그것의 목적은 이제 안디옥으로부터의 구출과 성전 예배의 갱신을 기념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비슬리-머리, 요한복음, 383).

유대인의 질문과 예수의 답변 사이에 수전절의 기능이 드러난다. 즉 영적 죽음에 놓인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예수의 사역을 통해, 그리고 더이상 예루살렘 성전이 존재하지 않는 지상에서, 오로지 하나님과 함께 예수를 예배의 대상으로 섬겨야 한다는 가르침이 10:22-42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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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chariah 14 as common background of John 7:37–39; 10:1–18 and Revelation 7:9–17; 21:1–8]

::Resources
Lee, Gwangsoo. “Reading John 7:37–39 in light of Zechariah 14.” In Stromata 60 no. 1 (2019): 41–52.
__________. "Reading John 10:1–18 in Light of Zechariah 9–14." Unpublished, 2018.
__________. “A Study on the Shepherd Motif in the Book of Revelation: An Intertextual Analysis of Zechariah 14, Revelation 7:9–17 and 21:1–8.” Th.M. diss., Westminster Graduate School of Theology, 2014.

1. My research history
The shepherd imagery in Revelation 7 is the starting point of my current concerns. I have been exploring the shepherd-king tradition of the Gospel of John since the Calvin Theological Seminary.

The provisional title of the doctoral dissertation is "Jesus the Good Shepherd in John 10: A Comparative Study between Jewish Tradition and Johannine Community of Messianism."

2. Zecahriah 14

According to my observation, Zechariah 14 uses the shepherd-king tradition and specifies the compliance with the Sukkot (= the Feast of Tabernacles).

8 On that day living water will flow out from Jerusalem, half to the eastern sea and half to the western sea, in summer and in winter.
9 The LORD will be king over the whole earth. On that day there will be one LORD, and his name the only name.

16 Then the survivors from all the nations that have attacked Jerusalem will go up year after year to worship the King, the LORD Almighty, and to celebrate the Feast of Tabernacles.

3. John 7:37–39 and 10:1–18
John 7:37–39 does not use the shepherd-king tradition or shepherd imagery, but it has a close thematic resemblance with 10:1–18. As you can infer from each title, I argue that both texts use Zechariah 14 as common background.

John 7:37–39 refers to the Sukkot, and heralds Jesus' death. Note the word "the living river" below.

37 On the last and greatest day of the Feast, Jesus stood and said in a loud voice, "If anyone is thirsty, let him come to me and drink.
38 Whoever believes in me, as the Scripture has said, streams of living water will flow from within him."

John 10 uses the shepherd-king tradition to predict Jesus' death. The good shepherd discourse is in the background of the Sukkot.

10 I have come that they may have life, and have it to the full.
17 The reason my Father loves me is that I lay down my life--only to take it up again.

4. Revelation 7:9–17 and 21:1–8

According to my observation, Revelation 7:9–17 implies the Sukkot and uses the shepherd-king tradition. Note the words "palm branches" (v. 9), "tent" (v. 10), "springs of living water" (v. 17) below.

9 After this I looked and there before me was a great multitude that no one could count, from every nation, tribe, people and language, standing before the throne and in front of the Lamb. They were wearing white robes and were holding palm branches in their hands.
15 Therefore, "they are before the throne of God and serve him day and night in his temple; and he who sits on the throne will spread his tent over them.

17 For the Lamb at the center of the throne will be their shepherd; he will lead them to springs of living water. And God will wipe away every tear from their eyes."

The connection between the Lamb and the shepherd is dim in the Gospel of John; here is the difficulty of my research. However, Revelation combines these two terms and applies them to Jesus. I assume the ideas of ​​the Lamb and shepherd in the Gospel of John make progress in the Revelation of John.

I argue 21:1–8 is a parallel with 7:9–17. Note the word "springs of living water" below.

8 He said to me: "It is done. I am the Alpha and the Omega, the Beginning and the End. To him who is thirsty I will give to drink without cost from the spring of the water of life.

We can imagine this passage link with John 7:37–39.

5. Conclusion
After these discussions, we can draw two conclusions: first, the similarity between the Gospel of John and the Revelation of John; second, the town authors use Zechariah 14 as backg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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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학 전공자들은 "신약의 구약 사용" 혹은 "상호본문성"으로 일컬어지는 방법론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신약 전공자들은 고대 근동부터 구약을 거쳐 제2 성전기 문헌을 기본으로 다뤄야 하고, 때로는 다른 신약 본문을 다뤄야 한다.

요한복음 연구자들은 요한복음의 저자가 에스겔을 많이 인용했다고 주장한다. 비슬리-머리는 그 중 하나이다.

복음서 기자는 에스겔의 사역을 특징지었던 예언자적인 통찰력이 그 계시자에게 특별히 존재했다는 것으로 이해한다(1:48; 2:23; 11:14; 13:38을 참조).

[출처] 비슬리-머리, 요한복음, 210.

나는 개인적으로 요한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본문은 스가랴서라고 생각한다. 나는 Calvin Theological Seminary 재학 시절 요한복음에 관한 두 가지 페이퍼를 제출했다. 하나는 게리 버지(Gary M. Burge) 교수의 "The Gospel of John" 수업 과제물로 제출한 "Reading John 7:37–39 in light of Zechariah 14”이란 페이퍼이다. 다른 하나는 "Reading John 10:1–18 in Light of Zechariah 9–14"라는 페이퍼로, 버지 교수의 지도로 진행된 Independent Study이다. 내가 관찰한 본문은 에스겔의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가 주류인데, 나는 스가랴의 영향이 더 크다고 주장한다. 버지 교수는 본인이 에스겔의 영향을 지지하는 주류에 속하면서도 나에게 모두 "A"를 주었다. 다만 "에스겔 혹은 스가랴 중 하나만 선택할 필요 없이, 요한은 에스겔과 스가랴의 영향을 모두 받았다고 주장해도 충분하다"는 조언과 함께 말이다.

아직 요한복음을 공부하고 있는 박사 과정 학생으로서 요한복음은 예언자 스가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주장할 위치에 있지 못하다. 더구나 스가랴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예언자가 에스겔이라고 간주되기 때문에, 요한복음은 에스겔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주장한 들 틀린 말은 아니다. 무엇보다 나 역시 에스겔에서 해결해야 할 부분이 남아 있어서 아직 어떠한 결론도 내릴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요한복음의 저자가 스가랴서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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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에서 '어린 양'과 목자 심상의 긴밀성은 명확하다.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계 7:17)

이와 관련하여 나는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학석사(ThM) 졸업 논문으로 "요한계시록의 목자 모티프: 스가랴 14장, 요한계시록 7:9-17, 21:1-8 상호본문성 연구"를 제출하였다. 이 논문은 스가랴 14장이 요한계시록 두 본문 7:9-17, 21:1-8과 연결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하지만 현 내 관심사인 요한복음 내에서는 두 심상의 연관성을 입증하는 작업이 쉽지 않아 보인다. 역사적으로 어린 양과 목자 심상은 별개로 전승되어 왔으나,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증언자들에 의해 두 심상이 하나로 병합되었다. 어린 양 전승은 그 흔적이 많지 않고, 이사야 53장과 연결짓는 해석이 주를 이룬다. 목자 심상은 고대 근동부터 고대 이스라엘까지 오랜 세월동안 통용되어 왔다. 내 추측에는 요한복음에서 두 심상이 결합되는 단서가 처음으로 나타나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미 교회공동체에 널리 퍼져 있었다고 보고 있다.

문제는 별개로 존재하던 두 심상이 하나로 접목되어 나타나는 요한복음 본문을 역추적하는 과정이다. 이제 Literature Review라고 해서 요한복음을 본문으로 연구 주제 심화 탐구를 하고 있다. 지금 단계에서는 섣부른 예단이나 짐작을 경계해야 하지만, 요한복음 저자가 두 심상을 창조적으로 결합하려는 시도를 하였다고 보고 있다. 후에 두 심상이 여전히 별개로 동작하고 있다는 결론이 날 수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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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하게도 요한복음에서 내가 집중적으로 관찰하고 있는 주제들이 모두 '죽음'과 연결이 되고 있다.
 
목자-왕 전승에서 목자의 죽음을 말하는 특이성(10장)이 그러하고, 성전 청결 사건과 죽음을 연결하는 흐름(2장)이 그러하다.
 
요한복음은 주제적으로 복잡하면서 정교하게 서술되어 있어서, 분석하면서 특이점을 계속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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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은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설명한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1:29)
 
하지만 요한복음에서 대속죄일과 관련된 언급이 없다. 내 추정에는, 예수의 속죄 사역은 대속죄일 날 행해지는 대제세장과 아사셀 중 그 어디와도 대칭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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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4를 '로고스'에 초점을 맞춰 헬레니즘 문화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난 성육신을 강조해서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21장을 보면, 예수의 승천 기사가 없다. 예수의 마지막 행적은 시몬 베드로에게 목양(=전도와 양육)을 명령하시고, 베드로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즉, 요한복음 처음과 끝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를 설명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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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제사(sacrifice)의 궁극적인 기능은 현존(God's presence)이라고 생각한다. 지도교수의 Jewish Sacrifice에 관한 글을 읽어보니, 내 생각과 동일한 지향점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 더 나아가서 초막절(the Feast of Tabernacles)과 성전(Temple) 역시 동일한 기능을 한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요한복음은 제사와 초막절, 그리고 성전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성육신으로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이 주장은 요한복음의 저술 시기가 예루살렘 성전 멸망 이후라는 가정과 맞닿아 있다.
 
큰 틀은 이러한데 세부사항을 채우는 것이 내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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