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미가서를 읽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특이점들이 있다. 아직 내 견해를 뒷받침해줄 자료는 찾지 못해서, 지금은 개인적인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1.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하나의 국가로 인식한다. 비록 분열왕국 시대를 살고 있지만, 두 왕국은 여전히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인식이 있다.


2. 남왕국의 정통성을 전제하고 있다. 미가 자신이 유다 지역 출신이라서 그런지 예루살렘 중심적 사고가 나타난다.


3. 다윗 왕조의 회복을 기대하고 있다. 비록 미가는 다윗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미래에 다윗 왕조의 회복된다고 선포한다.


4. 언약을 언급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간구할 때 보통 기도자는 언약에 기대는 성향이 있다. 하지만 미가는 아브라함과 야곱의 이름을 언급하는 정도에 머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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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블렌킨소프(Joseph Blenkinsopp)는 『David Remembered』 128–30쪽에서 미가서를 다룬다. 주된 내용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이스라엘의 지도자에 대한 예언이다. 그는 장차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선한 목자 은유"와 비슷한 역할을 감당한다고 지적한다. 아쉽게도 내 관심사인 "새로운 다윗 계열의 왕의 등장"과 "목자 은유"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세부적인 논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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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을 예고한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에 유래 없는 처첨한 멸망을 예언하지만, 그는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이 곧 왕조 체제의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다윗과 같은 왕의 부재가 왕국의 멸망을 가져 왔다고 생각했다. 다윗이 왕으로 등극한 이후 통치이념으로 사용했을 다윗 왕조 사상(Davidic royal ideology)의 영향을 받은 탓이라고 간주할 수 있고, 후대 사가들의 영향을 무시할 수도 없다. 하지만 다윗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탁월한 왕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고, 그를 역대 왕들의 행적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아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즉 다윗은 이스라엘 왕들의 이상향이자 지향점이었다.


아모스와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을 거점으로 사역했으므로, 그들이 새로운 다윗 계열의 왕(a new Davidic king)의 등장을 선포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그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와 달리 미가는 남유다에서 예언사역을 했기에 다윗의 후손이 다시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고 선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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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와 호세아, 미가는 모두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선지자들이다. 아모스와 호세아는 북이스라엘 지역에서 예언 사역을 감당했으며, 미가는 남유다를 주활동무대로 삼았다. 세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멸망과 구원 등 비슷한 내용을 선포했지만, 몇 가지 차이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다윗 계열의 왕의 등장이다.


The themes of remnant, a good shepherd gathering a scattered flock, salvation from exile, and divine kingship find expression in the other prophets (Amos 9:11–15; hos 1:11; 3:1–5). But Micah's contemporary to the south develops more fully this sketch of Micah. Following a description of a new Davidic king who is a peace-bringer, there is the following prophecy:


(이하 생략)


- Stephen G. Dempster, Micah, The Two Horizons Old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17), 105–6.


이러한 차이점은 다윗 왕조의 정통성에 대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지만, 그는 이스라엘 왕국을 상징하는 왕이다. 솔로몬 이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분리를 겪게 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윗 왕조의 정통성에 대한 논란이 빚어진다. 남유다는 다윗 왕조의 정통성을 부각한 반면 북이스라엘은 그러지 않았다. 이러한 영향으로 아모스와 호세아는 새로운 다윗 계열의 왕이 등장을 선포할 수 없었다. 반면 미가는 새로운 왕조의 등장을 다윗 왕조의 부활과 연관지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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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리는 자신의 책에서 미가서를 다루지 않는다. 내 생각에는 미가의 적용이 그의 전제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가의 활동 시기는 예레미야를 앞선다. 시기적으로 예레미야는 미가서를 알았을 가능성이 있다. 어쩌면 예레미야가 미가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둘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파악하려면 둘 사이의 목자 은유를 비교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하지만 베일리는 이 과정을 생략했다. 아마도 베일리는 미가서의 목자 은유가 시편 23편의 전통을 따르지 않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만약 내 짐작대로, 베일리가 미가서를 다루지 않는 이유가 시편 23편과 다른 목자 은유의 사용에 있다면, 후대 선지자들과 신약 저자들이 미가서가 아닌 예레미야의 전통을 따른 이유가 무엇인지 분석할 필요가 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예레미야의 전통을 따르도록 했을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려면 미가서의 목자 은유는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The study of the Good Shepherd in the Holy Bible of Kenneth E. Bailey is impressive for many modern readers. He deals with several texts in his book, of which the Old Testament texts he covers are Psalm 23 (ch. 1), Jeremiah 23:1–8 (ch. 2), Ezekiel 34 (ch. 3) and Zechariah 10:2–12 (ch. 4). He believes that the personal confession of Psalm 23 has turned into a communal confession through Jeremiah. And he thinks that Ezekiel and Zechariah reinterpreted the tradition of Jeremiah according to the theology of each one. He also covers Luke 15:1–10 (ch. 5), Mark 6:7–52 (ch. 6), Matthew 18:10–14 (ch. 7), John 10:1–18 (ch. 8), and 1 Peter 5:1–4 (ch. 9) in the New Testament. I wonder why Bailey does not deal with shepherd motifs of Micah in his book. I think the reason is that Micah’s applications do not meet his premises. The period of Micah’s activity precedes Jeremiah’s. Jeremiah would have known Micah. Perhaps it is possible that Jeremiah was influenced by Micah. To understand the commonalities and differences between the two prophets, it is necessary to compare the shepherd metaphor between the two texts. But Bailey skipped this process. Perhaps Bailey has determined that Micah’s shepherd metaphor did not follow the traditions of Psalm 23. If my guess is correct, then it is necessary to analyze why the later prophets and the New Testament writers followed the tradition of Jeremiah, not Micah. What made them follow the tradition of Jeremiah? To answer these questions, we need to know what features Micah’s shepherd metaphor h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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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서를 훑어보니 대략 네 군데 정도 목자 은유가 등장한다. 그 중에서 다윗 계열의 구원자 사상(Davidic messianism)과 목자-왕 은유(Shepherd-King metaphor)가 동시에 나타나는 본문은 5장 1-5절이다. 


1. 딸 군대여 너는 떼를 모을지어다 그들이 우리를 에워쌌으니 막대기로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치리로다

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3. 그러므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의 형제 가운데에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4.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5.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궁들을 밟을 때에는 우리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그를 치리니


보통 선지자들은 다윗 계열의 새로운 왕을 예루살렘과 연결하는데, 미가는 베들레헴 에브라다를 향해 예언을 선포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다윗의 출생 장소가 베들레헴이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또한,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이라는 표현에서 미가는 목자와 군왕을 동일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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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미가는 주전 722년 사마리아의 멸망 전 앗수르의 위기에 대해 말했다. 스가랴 9-14장의 저자는 아마 주전 500년 전후에 예루살렘에서 활동했을 것이다. 두 본문은 국가의 멸망 이전의 위기와 이후의 처참한 상황을 다루고 있다. 스가랴 9-14장은 묵시적 언어가 사용되어 있는데, 당시 묵시주의자들은 현재 악한 시대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읽어버렸다. 그들은 우주적인 전쟁, 즉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한다. - 랄프 스미스, 미가-말라기, 13-4.


미가 2-5장과 스가랴 9-14장은 모두 목자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스라엘의 처참한 상황에서 목자 은유가 사용된 목적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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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연구결과들에 의하면, 스가랴 9-14장의 목자 은유(shepherd methaphor)가 나타나는 본문은 3-4곳 정도이다.

◎Anthony R. Petterson (10:1–11:3; 11:4–17; 13:7–9)
◎Joseph Blenkinsopp (11:4–17; 12:10–14; 13:7–9)
◎Kelly D. Liebengood (9:9–10; 11:4–14; 12:10; 13:7)
◎Mark J. Boda (10:1–3; 11:1–3, 17; 13:7–9)
◎Paul L. Redditt (10:2–3a; 11:3, 4–16[17]; 13:7)
◎Young-Sam Chae (9:9–15; 10:1–6; 11:4–17; 12:6–14; 13:1–9)

학자들마다 목자 은유에 대한 견해는 조금씩 다르지만, 스가랴 9-14장의 주제가 심판과 회복이며, 그 중심에는 목자 은유가 있다는데 다들 동의한다. 특히, 11장의 목자의 두 막대기 상징 행위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에 대한 강조에 대해서는 모두 한 목소리를 낸다.

나는 기존 견해 보다 더 나아가서 9-14장 전체에 걸쳐 목자 은유가 나타난다고 주장하는데, 그 단서가 스가랴가 목자 은유를 사용할 때 꼭 목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데 착안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고대근동에서 오랫 동안 목자가 왕을 상징하는 은유로 사용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에도 주목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은 목자이고, 목자는 왕이었다. 이를 전문용어로 '목자-왕'(Shepherd-king)이라고 한다. 주변 국가에서는 이 용어를 왕에게 적용했으나, 이스라엘에서는 일차적으로 야웨에게 적용했고, 그 다음으로 왕을 지칭하는데 사용했다. 이러한 의도는 너무나 분명하다. 현세의 왕은 야웨의 대리인이며,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하나님 한 분이기 때문이다.

고대근동에서 왕의 주요임무 중 하나는 정의의 실현이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강조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심판은 정의 실현의 방편이다. 스가랴 9장의 시작은 이방 국가들을 향한 심판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심판을 여호와의 전쟁(Divine Warrior)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럴 경우 전체의 흐름을 이해하는 큰 그림을 놓치기 쉽다. 대신에 왕의 정의 실현이라는 관점으로 본다면, 스가랴 9장은 처음부터 목자-왕 은유로 시작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14장의 야웨의 날 역시 동일하게 목자-왕 은유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9절의 왕의 등극 선언은 14장 전체의 핵심이자 목자-왕 은유의 절정이다. 그리고 이방국가들을 향한 초막절 준수 명령을 통해 하나님의 열방통치를 상징하는 그림으로 스가랴서가 마무리 된다.

이렇듯 고대근동의 목자-왕 은유를 염두에 두고 9-14장을 읽으면, 선지자 스가랴가 꿈꾸었던 그리고 전하고자 했던 심상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다.

새벽에 잠에서 깨어나 책 읽다가 스가랴 9장의 도입부부터 목자-왕 은유로 해석할 수 있다는 글을 쓰다니, 아닌 밤 중에 홍두깨인가 신령한 은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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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The shepherd imagery in Zechariah 9-14>

[저자] D. F. O’Kennedy (University of Stellenbosch)

[출처] http://www.scielo.org.za/pdf/ote/v22n2/1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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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로날드 클레멘츠의 글을 인용해서 선지자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자.


Probably such a political possibility could not readily have been envisaged; a popular democracy was not then a recognized ideal in Israel. Instead, the full weight of responsibility is placed by Israel's prophets on the institution of kingship—and by implication on all related offices of public leadership—as a form of commitment and service for the benefit of others. - Clements, Ezekiel, 155-6.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중민주주의가 이상적인 체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언급은 시대착오적이다. 그 당시 대중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생성되어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므로, 클레멘츠의 진술은 부적절하다. 그러나 선지자의 역할에 대한 언급은 타당하다. 이스라엘에서는 왕조 체제라 하더라도 선지자는 왕 앞에 설 수 있었다. 그래서, 왕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했을 때 그 앞에 서서 그들을 꾸짖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했다. 이러한 사실을 오늘날 적용해보면, 목회자들은 선지자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런데 왜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제사장 역할만 부각시키고 선지자의 책무는 다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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