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요한복음의 새 계명에 담긴 새로움의 의미 / 우성훈 / Canon & Culture 4권 1호 2010-봄

http://www.itheology.kr/canon/cc_read.php?menu=&mode=list2&mode=view&idx=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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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의 율법과 사랑 / 문우일 / Canon & Culture 7권 1호 2013-봄

http://www.itheology.kr/canon/cc_read.php?menu=&mode=list2&mode=view&idx=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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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와 선지자의 관계 / 박영진 / Canon & Culture 5권 2호 2011-가을

http://www.itheology.kr/canon/cc_read.php?menu=&mode=list2&mode=view&idx=159

 

기대하는 마음으로 읽었으나, 요한복음 내에서 초막절의 기능과 다윗 기독론의 의미를 놓친 사례로 남는다. 아래 글을 읽으면, 내 주장과 앞으로 연구 활동을 유추할 수 있다.

 

1. 요한복음 4장과 7장에 나타난 생수 모티프의 목적

2. 요한복음에 나타난 모세 기독론과 다윗 기독론

3. 요한복음의 모세 기독론과 다윗 기독론으로 유추해보는 청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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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서막에 나타난 로고스의 선재와 성육 / 서형석 / Canon & Culture 4권 1호 2010-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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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전 시대(Templeless age)는 질 미들마스(Jill Middlemas) 박사가 사용하는 용어이다. 이 용어의 한계를 알지만, 바빌로니아 침략으로 인한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부터 느헤미야의 성전 재건 이전까지를 지칭하는 무성전 시대와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로 추정되는 요한복음 저작 시기 사이의 유사한 환경을 강조하려고 한다.

요한복음 저작 시기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 AD 70년 이후로 가정되고 있다. 우리는 바울의 초기 서신을 통해 신앙 공동체에 공통된 신앙 고백이 있었다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공관복음은 예수의 생애와 그의 사역에 관한 권위 있는 기록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또 다른 복음서를 기록했는데, 그 동기를 예루살렘 성전 파괴로 간주하는 게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여기서 나는 수많은 학자가 언급하는 출교 결의(9:22)보다 성전 파괴가 더 강력한 집필 동기로 작용했다고 가정한다. 결의문의 효력은 검증할 수 없으므로 이 사건이 실제로 심각했다는 증거는 희박하다. 그런데도 요한복음의 진술은 독자가 더이상 회당에 출입할 수 없는 처지라고 믿도록 만든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반면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스라엘 역사상 충격적 사건으로 기억된다. 요한공동체에게, 혹은 요한복음이 암시하는 독자에게는 더이상 회당도 성전도 없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교회가 있다.

요한복음의 저술 동기가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관련 있다는 내적 단서로는 요한이 예수를 성전으로 묘사하는 데 힘을 쓴다는 점이다. 첫 번째, 요한은 성전 청결 사건(2:12―22)을 예수의 공생애 초기로 보도록 배치했다. 이러한 의도는 성전 파괴를 경험한 세대에게, 그리고 더이상 성전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는 세대를 향한 함의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출교 결의로 인해 그들은 회당에 갈 수 없는 상황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성전 청결 사건 이후에도 예수를 성전과 연결 짓는 본문이 여럿 있다. 저자의 의도는 명확하다. "예수가 성전이시다!"

유대인은 이미 로마 군대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앞서 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한 솔로몬 성전 파괴를 경험한 적이 있다. 바빌로니아 포로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치욕의 세월 동안 이주민들은 이스라엘 멸망과 회복을 예고한 선지자들의 예언을 기억했다. 포로 귀환 이후 최대 관심사는 성전 재건에 집중되었고, 율법 준수 운동이 강조했다. 이스라엘 왕국 멸망과 예루살렘 성전 재건까지 귀환 공동체는 혁명적인 신학적 진보를 이루어냈다.

이와 유사하게, 요한은 2차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 새로운 복음서를 써야 하는 의무감이 공관복음서와 다른 패러다임을 이끌어 냈다고 할 수 있다(=paradigm shift). 요한복음의 객관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가 많이 있지만, 최근 경향은 요한이 역사적 자료에 충실했다는 견해에 힘이 실리고 있다. 요한이 처한 시대적 상황은 그가 역사적 사실보다는 신학적 의미에 중점을 더 주도록 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요한이 역사적 자료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객관적 사실에 기반하면서 신학적 의미를 더 강조했다는 의미로, 그 과정에서 사실의 변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더이상 성전 재건은 의미가 없다. 교회 공동체로 충분하다. 더이상 율법 준수를 강조할 필요가 없다. 복음으로 충분하다. 이렇듯 회당 출교 결의와 성전 파괴라는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요한은 기존 관습을 허물고 교회(에클레시아) 중심의 공동체를 위한 복음서를 기록해야 했다.

요한의 관점에서 현 상황에 가장 큰 장애물은 유대인의 성전 중심의 사고와 율법주의였다고 가정할 수 있다. 여기서 나는 요한복음의 암묵적인 독자는 유대인 혹은 유대계 기독교인으로 가정한다. 요한복음의 암묵적인 독자가 이방인이라고 가정하기에는 유대적인 진술이 넘쳐난다.

요한은 유대계 기독교인과 전도 대상인 유대인을 대상으로 복음서를 기술하면서, 성전 중심의 사고를 탈피하는 탈 성전주의(≠반 성전주의)와 유대주의와 결별하는 탈 유대주의(≠반 유대주의)를 강조하고자 했다.

1. 탈 성전주의
요한복음에서 성전 청결 사건과 예수의 부활 예고(2:13―22)는 공생애 초창기로 추정하도록 의도되어 있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더이상 예배의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신다(4:20―24). 또한, 요한은 종말론적 성전을 묘사한 스가랴 14장의 예언이 예수를 통해 성취되었다고 묘사할 뿐 아니라 성령에 대해 언급한다(7:37―39). 이외에도 여러 본문이 있음.

역사적으로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 성전 재건과 유대주의로의 회귀를 염두에 두고, 요한이 탈 성전주의를 의도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본다.

2. 탈 유대주의
요한복음은 유대주의에 적대적이지 않다. 오히려 요한은 유대인의 전통을 잘 활용한다. 일례로, 초반에 자주 등장하는 모세에 대한 언급은 의도적이다. 유대인은 오랫동안 모세와 같은 선지자(the prophet like Moses)를 고대했다. 요한은 이러한 기대를 반영하여 예수를 메시아라고 선포하는데, 단순히 모세 기독론(Mosaic Christology)이 아니라 모세를 능가하는 예수(More than Moses)로 묘사하고 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율법의 성취자이시다.

교회 공동체 내부에도 여전히 율법 준수를 강조하는 유대계 기독교인이 존재했을 텐데, 요한에게 율법주의는 교회 내부나 외부적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절기의 기능
요한복음에서 절기의 역할은 아주 중요한데, 이를 간과한 해석이 너무나 많다. 내 박사 학위 논문에서 중점적으로 다룰 주제이다. 내가 볼 때 요한복음에서 절기의 기능은 매우 정교한데, 현재 가정하는 바로는 예수를 절기의 의미를 성취하신 분으로 묘사하는 동시에 탈 성전주의와 탈 유대주의를 아우르는 역할을 한다.

정리하자면, 요한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가 야기한 교회 공동체 내부의 혼란을 잠재우고, 대외적으로는 복음 전도 전략 차원에서 공관복음과 다른 관점의 복음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게 내 가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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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학계에서는 E. P. 샌더스의 영향인지, 역사적 예수 연구 영향인지, 바울의 새 관점 파급효과인지 모르겠지만, 유대주의를 율법적 공로주의로 단정 짓지 않고 다양한 노선이 존재했다는 전제하에 연구를 진행하려는 시도가 많아지고 있다. 요한복음에 국한하면, 이 복음서는 오랫동안 헬레니즘의 영향이 지대하다는 전제로 연구되어 왔다. 그러나 유대주의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추세 가운데, 헬레니즘의 영향보다 유대주의의 영향이 더 크다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근래에는 요한복음을 유대주의로 분석하려는 시도가 많아지고 있다.

사설이 길었는데, 나 자신부터가 요한복음을 읽으면 읽을수록 헬레니즘의 그늘보다는 유대주의의 웅장한 배경이 보인다. 요한복음의 사상적 모태가 헬레니즘이냐 유대주의냐를 밝혀야 하는 이유는 청중을 가늠하는 주요 척도이기 때문이다. 나는 요한복음이 유대주의의 웅장한 배경 아래 있다고 생각하므로, 청중 역시 유대인이나 유대계 기독교인으로 상정한다는 의미가 된다. 

모세 기독론과 다윗 기독론은 요한복음의 청중이 이스라엘 역사에 해박하다는 증거일 수 있다. 며칠 전에 작성한 "요한복음에 나타난 모세 기독론과 다윗 기록론"에서 더 나아가, 나는 요한의 모세 기독론과 다윗 기독론에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모세 기독론은 교회 내부에서 모세의 율법을 강조하는 유대계 기독교인들을 향해 예수가 모세보다 위대한 메시아(the better than Moses Christology)로 가르치고, 다윗 기독론에서는 다윗 계통의 구원자 사상(Davidic Messianism)을 추종하는 유대인이나 유대계 기독교인이 많았을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역으로 다윗을 강조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요한의 다윗 기독론에 대한 태도는 이스라엘 회복을 열망했던 열광주의자로 인해 성전 파괴가 이루어진 후 분위기를 반영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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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목적은 차후 연구를 위해 내 생각을 정리하는 데 있다. 그래서 사례나 근거 제시는 빈약하다.

Joel Willits 박사는 요한복음에서 다윗 기독론(Davidic Christology)이 모세 기독론(Mosaic Christology)을 대체했다고 주장한다. 모세와 다윗 사이의 유사성을 인정하지만, 역대기 사가는 다윗이 모세보다 나은 인물로 묘사하고, 요한복음은 예수를 다윗 계열의 메시아로 묘사한다고 주장한다.

내가 볼 때 이러한 주장은 완전히 틀렸다. 요한복음이 묘사하는 예수는 모세보다 나은 메시아(the better than Moses Christology)이자 다윗을 능가하는 메시아(the better than David Christology)이시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청중이 다윗 계열의 구원자 사상(Davidic Messianism)에 익숙하긴 했지만, 모세의 제자라고 자칭하는 집단(9:28-29)도 존재했다. 요한복음의 목적은 "오직 예수만이 진정한 메시아이시다"(20:31)라고 선포하는 데 있다. 예수는 모세와 같은 메시아도 아니고 다윗과 같은 메시아도 아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자신의 사역을 가르치는데 모세와 다윗을 모두 사용하신다. 예를 들어, 예수의 죽음에 관한 가르침에서 예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3:14)라고 말씀하셨고, 나중에는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10:11, cf. vv.15, 17)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누차 강조하듯이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에서 예수가 사용한 목자-왕 전승은 다윗 계열의 구원자 사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예수가 모세를 능가하는 메시아라는 가르침은 만나와 생명의 떡(특히, 6:22-25)에 잘 나타나 있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는 이적을 경험했지만, 지도자 모세가 그 만나를 준 것이 아니다. 반면 예수는 생명의 떡이시다.

요한복음에서 모세와 예수 사이의 대조는 두드러지지만(최소한 1-7장), 다윗과 예수에 관한 대조는 명백하지 않다. 엄밀히 말해 대조는커녕 다윗 기독론 자체가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우리는 몇몇 본문에서 예수 생애 당시 유대인이 다윗 계열의 메시아를 고대했다는 단서를 찾을 수 있을 뿐이다(7:42; 12:12-15). 목자의 죽음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은 유대인에게 익숙한 전승이 아니라는 증거이다(참조. 10:19). 예수의 죽음은 영생을 주기 위해서이다(10:28). 차후에 완성될 목자-왕 전승과 선한 목자 담론 사이의 비교 연구는 다윗 계열의 구원자 사상과 예수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극명하게 드러내주 리라 기대한다. 이 정도로도 우리는 선언할 수 있다. 예수는 다윗을 능가하는 메시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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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스겔 40-48장은 재건될 성전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구약에서 성전 신학의 정수는 스가랴 14장에 나타난다고 봐야 한다.
2. 요한복음은 예수를 성전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자의식을 스가랴 14장이 아닌 에스겔 40-48장으로 연결짓는 해석이 압도적으로 많다.
3. 스가랴와 요한복음을 성전으로 연결하는 시도가 가능하다는 근거는 피터 R. 아크로이드, 이스라엘의 포로와 회복, 321-322에서 유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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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목적은 차후 연구를 위해 내 생각을 정리하는 데 있다. 그래서 사례나 근거 제시는 빈약하다.

요한복음에는 '빛'과 '어둠'처럼 '대조'되는 용어들이 많이 등장한다. 한때 학계에서는 이 용어들의 기원이 헬레니즘의 '이원론'이라고 주장했으나, 지금은 유대주의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다. 나는 유대인들이 예언서의 '심판'과 '회복'이라는 주제와 '메시아사상'에 익숙했다는 전제 아래 유대주의 기원설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굳이 헬레니즘 문헌을 보지 않아도, 예언서와 묵시문헌에 이분법적 표현이 제법 많이 나타난다.

나는 이 용어들의 기원보다 더 주목해야 할 지점은 저자의 의도라도 생각한다. 요한은 자신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명확하게 밝힌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

이 구절에서 요한이 '그리스도'란 단어를 사용했다고 헬레니즘의 영향을 주장하는데, 다른 구절에서는 '메시아'라는 단어도 나온다. 요한이 두 단어를 번갈아 사용하여 로마 황제 숭배 사상을 배격하는 동시에 유대주의 메시아사상을 예수에게 적용했다고 볼 수도 있다.

요한복음의 청중이나 독자가 누구인지 단정 지을 수 없다. 학계에서는 요한공동체라는 용어를 선호하지만, 요한의 저술 의도를 고려한다면 복음 전도의 측면을 더 강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너희로 ... 믿게 하려 함이요"라는 말은 아직 요한의 가르침을 듣는/읽는 무리 가운데 불신자가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를 다녀보면 알겠지만,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교인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다 신자로 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요한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해서 그들이 다 신자라고 간주할 수는 없다. 나는 요한복음이 불신자들을 향한 전도지침서인 동시에 공동체 내부를 위한 신앙교육서로 간주해야 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최근에 초기 유대주의 내 다양한 관점에 관한 연구들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경향을 고려해, 우리는 청중/독자의 다양성을 고려해야 한다.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에 따르면, 저자는 청중/독자가 가진 선지식을 바꾸려고 한다. 공동체 일원이든 외부인이든 그들의 사상과 신앙에 도전하고 복음에 근거한 믿음을 갖도록 이끌려고 한다. 문학적 기법으로서 대조의 기능은 이러한 의도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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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계획으로는, 박사 과정 이후에 요한복음의 삼위일체를 다룰 생각이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하나됨'(oneness)이란 주제를 연구할 생각이다. 이 주제는 요한복음 10장에서 목자-왕 전승과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연구 주제를 확장할 수 있다.

D. A. 카슨 박사가 편집하는 "성경신학의 새로운 연구"(New Studies in Biblical Theology) 중 안드레아스 쾨스텐베르거와 스코트 스웨인이 공동집필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란 책이 몇 년 전에 번역되었다. 정확한 구입 시기와 의도가 기억나지는 않지만, 출간 시기를 고려하면 내 연구 주제와 상관 없이 순전히 책 제목에 호기심을 느낀 듯하다.

이 책은 성경신학자와 조직신학자의 공동작업을 거쳤는데, 애초 시리즈의 목적대로 각 자의 전문성을 살려 본문 해석 이후 건전한 교리를 확립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건, 요한복음의 삼위일체가 선교를 지향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실 계획을 세우신 하나님, 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성육신하신 예수님, 승천하신 예수님을 대신해 성도를 도우러 이 땅에 오신 성령님으로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주장이다. 복음서가 복음 선포라는 고유한 특성을 가진 장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그리고 요한복음의 독특한 신학을 고려한다면 설득력이 있다고 느껴진다.

이 책 자체로 집필 의도를 충분히 달성하고 있으며, 내 차후 연구의 방향성을 설정하는데 도움을 준다. 아직까지 요한복음의 삼위일체를 다룬 책이 별로 없다고 하는데, 개론서로 충분히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Review of Biblical Literature
https://www.bookreviews.org/bookdetail.asp?TitleId=6661&CodePage=6661,1921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국내도서
저자 : 안드레아스 쾨스텐베르거,스코트 스웨인 / 전광규역
출판 : 부흥과개혁사 2016.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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