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수많은 자료를 검토하다 보면 저자의 주장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동일 주제 내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만약 복수의 자료를 검토한 후에도 차별점을 갖는 저자나 주장을 찾지 못했다면, 본인의 자료 수집과 수용력을 의심해봐야 한다. 특정 집단의 자료만 검토하지 않는 이상 단일 견해로 수렴될 가능성은 전무하다. 아니면 본인의 독해력이 문제일 수도...

특정 주제에 관해 여러 주장이 존재하더라도 통용되는 견해는 2~3가지 정도로 정리된다. 당연히 그 이상일 수도 있다. 연구 방향성을 빨리 잡으려면 자료 검토 단계에서 학계의 주장을 잘 정리한 자료를 최대한 빨리 찾아서 반복적으로 읽어서 틀을 잡아둘 필요가 있다. 일차적으로는 주장 별 근거를 숙지하고, 다음에는 반복적으로 읽어서 견해 별로 진술하는 방식을 습득해야 한다.

만약 세부적인 자료를 찾기 쉽지 않다면, 독자 스스로 비교 분석을 해야 한다. 당사자에게는 힘겨운 작업이겠지만, 달리 말하면 학계에서 연구가 덜 진행되어 앞으로 집중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의미가 될 가능성이 있다.

기존 견해를 잘 다룬 자료라 하더라도 독자 스스로 선행 연구를 정리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능력이 바로 '핵심파악'이다. 저자별 핵심 주장을 정리하면, 쉽게 '비교 분석'을 할 수 있다. 비교 분석을 하고 나면, 특정 주장에 손을 들어주거나 본인이 새로운 주장을 개척할 수 있게 된다.

교수가 학생에게 가장 많이 요구하는 과제 중 하나가 바로 비교 분석일 거다. 칼빈 재학 시절 한인유학생의 사례를 참고해 보면, 학생이 교수에게 연구 주제를 문의하면 교수는 A와 B를 비교해보라는 말을 해준다고 한다. 가령 조직신학 전공으로 <성령론> 수업에서 소논문 주제를 찾고 있다면, "A와 B의 성령론 비교 연구"가 연구 주제로 잡으면 된다. 내 경우 "Reading John 7:37-39 in light of Zechariah 14"란 주제로 쓴 페이퍼를 게리 버지 교수의 <요한복음> 수업 과제로 제출했다. 이 글은 요한복음 7:37-39의 구약 본문으로 제시되는 각 구절을 비교하고, 스가랴 14장이 그 배경이라고 주장한 글이다. 이런 식으로 비교 분석은 가장 흔하면서 가장 효과적인 연구 방법이다. 때로는 쉬운 작업으로 과소평가될 수 있지만, 비교는 각 주장의 독특성을 분별하는 수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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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메시아'의 용례를 통해 고대 유대 사회 메시아사상의 기원부터 로마 제국 시대까지 연구한 책이다. 나는 저자의 유려하고 담백한 글에 감탄했고, 풍성한 자료 제시와 곁들여진 논박 과정에서 감탄하며 읽었다.

 

내 경우 일차적으로 목사-왕 전승을 중심으로 메시아사상을 연구하고, 추후 점진적으로 메시아사상으로 연구 범위를 넒힐 예정이었다. 내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던 책이라는 이야기이다.

 

지도 교수가 읽어 보라고 해서 계획을 바꿔 열심히 읽었는데 보람이 있다. 분량이 많지는 않지만, 쉽게 이해되는 책은 아니다.

 

The Grammar of Messianism: An Ancient Jewish Political Idiom and Its User / Matthew V. Novenson / Oxford University Press

https://www.amazon.com/dp/0190053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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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le Christology In the Gospel of John / Mark Kinzer

https://www.academia.edu/737649/Temple_Christology_In_the_Gospel_of_J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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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저자와 독자가 책이란 매개체로 간접적인 소통을 하는 행위이다. 저자는 독자를 향한 저술 목적이 있으며, 본인의 의도에 부합한 이해를 갖기를 희망한다. 때로는 독자의 반응을 저자의 저작물에 반영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저자는 전달에 중점을 둔다.

지식 축적 과정에서 핵심 파악 능력이 중요하다.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독서는 저자가 저술을 통해 의도했을 독법을 배제하고, 독자의 일방적인 수렴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학계에서는 '독자반응비평'이라고 해서 저자의 의도보다 독자의 이해에 더 강조점을 두기도 하는데, 나는 여전히 대세는 저자의 의도를 중요하게 간주한다. 저자의 입장을 고려할 때, 독자반응비평은 효용 가치가 떨어진다는 게 내 입장이다. 혹여나 독서의 목적이 여가 선용이라면 별문제가 없겠으나, 지식 축적이나 활용에 있다면 큰 문제를 낳는다. 독자는 시간과 양이 아닌 질에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 또한 거대 담론이나 지엽적인 서술이 아닌 핵심 파악에 집중해야 한다. 각 문단의 핵심이 쌓여 책 한권을 꿰뚫게 된다. 국어 시간에 문단마다 핵심 주제를 찾는 훈련을 하는 이유가 있다.

상위 과정으로 올라갈수록 독서량은 압도적으로 늘어난다. 당연히 정확한 이해는 필수이다. 소논문 수준의 과제를 해야 한다면, 최소 10권 이상의 책을 읽을 텐데, 책의 핵심을 파악하고 있다면 손쉽게 인용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각 책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면 인용할 때 낭패를 본다. 실제로 학계에서 저자가 새로운 주장을 전개하는 방식은 기존 해석의 결함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 교수로 활동하고 있더라도 주요 논지를 잘 못 파악해서 다른 학자로부터 학술적으로 두들겨 맞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강의마다 강사가 의도하는 방향이 있다. 수업 교재는 그 방향성에 가장 부합한 책이거나 서로 보완해주는 역할을 한다. 강의와 별도로 학생이 오랜 시간 고민해야 할 주제가 있다면, 강사는 서평이라는 과제를 부여하는데, 교수 입장에서 요약이나 서평은 학습자의 이해를 가늠하는 유용한 수단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대학원 과정까지 요약이나 서평 과제는 10쪽 내외로 주어진다. 요약이라도 1장 정도는 개인의 견해를 쓰도록 한다.

3년 정도 대안학교에서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북 포럼을 진행한 적이 있다. 1년 반 정도는 독서 토론으로 진행하고, 나머지는 글쓰기 훈련을 했었다. 그때 경험에 의하면, 요약이나 서평만으로 학생이 성실히 과제를 수행했는지, 얼마나 많이 고민했는지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내 의도대로 책을 읽었는지 점검해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요약과 서평이 좋은 훈련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초급 단계에서는 각 분야에 관한 이해도가 떨어져서 책 한 권 소화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점차 동일한 시간에 더 많은 책을 읽고 소화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초반에는 직접 인용이 많겠지만, 점차 재진술(paraphrasing)과 간접 인용을 늘려야 한다. 학습자는 점차 요약 분량을 줄이는 훈련을 하면서 간접 인용도 줄이는 훈련도 해야 한다.

지난한 훈련이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기본에 속한다. 예를 들어 논문에서 연구사가 곧 요약이다. 중요도에 달려 있지만, 서론 단계에서는 몇 줄 정도로 압축해서 다룬다. 최소 소논문 하나, 최대 책 한 권 분량을 단 몇 줄로 진술할 수 있어야 한다. 비록 쉬운 작업은 아니지만, 핵심을 잘 파악하고 있다면 저자 재량껏 분량을 조절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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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메시아에 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모세를 이상적인 지도자로 그리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필로의 저술을 바탕으로 표면적인 해석을 수용하지 않고, 로마 제국의 통치라는 그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노출되지 않은 이면의 의도를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들에 따르면, 필로는 메시아라는 정치적 논란을 야기할 수 있는 단어를 사용하는 대신에 지도자의 덕목을 다루면서 모세를 이상적인 메시아로 제시했다. 만약 이들의 주장이 옳다면, 필로가 다윗을 언급하지 않은 이유가 설명된다.

요한복음에서 모세는 아주 중요한 위치를 갖는다. 특히 율법의 수여자로서 유대인이 예수를 정죄하는 결정적인 기준이 된다. 유대인 집단과 갈등이 증폭되지만, 동시에 예수를 선지자이자 메시아로 고백하는 개인과 집단도 커져간다. 메시아사상을 관점으로 요한복음을 보면, 12장은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 계열의 구원자 사상(Davidic Messianism)을 믿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에서 목자-왕 전승 역시 그 증거가 된다. 그러나 요한은 끝끝내 다윗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 나는 이러한 의도가 메시아사상의 반작용을 고려했다고 짐작하고 있으며, 내가 풀어야 할 과제 중 하나이다.

오늘 필로의 메시아 사상에 관한 논증을 통해서, 내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찾은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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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ph Klausner는 메시아 칭호에 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유대 문헌에서 셀류키드 제국에 맞서 하스모니안 왕조로 일컬어지는 유대 왕국을 재건한 Judah Maccabee는 메시아로 지칭되지 않지만, 로마 제국에 맞섰으나 실패한 지도자 Shimon bar Kosiba는 메시아로 불리는 이유에 관한 것이다.

Matthew V. Novenson은 이 질문에 답하고자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 선지서부터 랍비 문헌에 언급된 몇몇 인물을 소개한다. 그리고 그는 Morton Smith의 글을 인용해 메시아 칭호는 특정 인물의 업적에 관한 동시대 사람의 반응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메시아의 등장에 관한 예언을 토대로 다윗 계열의 메시야(Davidic Messianism)와 같은 유대 사회 내 일종의 메시아를 선별하는 기준이 있었다. 첫 번째 기준은 다윗 가문의 후손이어야 하고, 두 번째 기준은 업적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동시대 사람들이 특정 인물을 메시아로 인식했느냐 아니냐로 갈린다. Klausner가 의문을 제기한 Judah Maccabee와 Shimon bar Kosiba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메시아의 조건

Marvin A. Sweeney는 『예언서』(대한기독교서회)에서 예언자들이 선포한 회복될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다윗 계열의 메시아라고 주장한다. 메시아의 조건으로 다윗 혈통을 강조한 이유는 다윗 언약(삼하 7:8-16)에서 정당성을 찾을 수 있다. 역사적으로 다윗은 이상적인 왕으로 기억된다. 따라서 종말적인 왕의 등장을 고대하는 유대인에게 이상향은 혈통으로는 다윗 가문이고, 업적과 행실은 다윗과 같은 왕이어야 한다.

견고한 신념과 달리 다윗 계열의 메시아에 관해서는 의구심이 있다. 특히 예언서에서 메시아의 등장에 관한 본문을 분석해 보면, 종말론적 구원을 성취하는 왕에 대한 묘사에서 특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내 관찰은 목자-왕 전승에 관한 본문 연구를 토대로 하고 있다. 대다수는 다윗 혈통의 메시아를 공표하지만, 몇몇 예언자들은 다윗과 같은 왕이 등장한다고 선포하여 다윗 가문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영토 회복과 성전 재건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더구나 후자의 경우 다윗이라는 특정 인물보다는 종말론적 구원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왕되심을 선포하는 경향이 있다.

메시아의 조건에서 업적과 행실에 관한 이견은 없다. 다윗과 같은 목자가 이스라엘 영토 회복과 성전 재건을 이루는 날을 종말론적 구원으로 그린다. 헤롯 대왕이 메시아로 불리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메시아의 조건은 확실히 영토 회복과 성전 재건이다. 영토 회복은 하스모니안 왕조를 적대했다는 측면에서 이견이 있을 수 있고, 헤롯의 혈통적 정당성은 확보하지 못하지만, 자신의 성과를 과시하고자 성전 공사를 강행한 헤롯의 야망은 성공적이었다. 이 부분에서 이스라엘 역사상 두 번째로 독립국가를 이루한 Judah Maccabee가 메시아로 인식되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결론적으로 메시아의 조건은 이스라엘 영토 회복과 성전 재건이며, 더 중요한 변수는 동시대 사람들의 평가라고 할 수 있다.

메시아 예수

공관복음에서 예수의 다윗 혈통을 강조한 이유는 예수의 메시아됨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메시아가 다윗 혈통이어야 한다는 신념에 균열을 내신다. 전문 용어로는 Davidssohnfrage("the messiah cannot be the son of David")이라고 한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예수의 업적은 메시아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 특히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역사상 유례가 없을 뿐 아니라 메시아 공식과 동떨어져 있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군중의 반응은 그들이 군사적 메시아를 고대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족보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대뜸 요한은 예수의 기원이 하늘이라고 선포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로고스라는 개념을 통해서 말이다. 또한 2장에 성전 정화 사건을 배치해 성전되시는 예수를 강조한다.

믿음의 고백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역사와 예언자들의 선포를 통해 메시아관을 정립했다. 그들의 기준에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한다. 지상적 영토와 성전을 갈망하는 유대인과 달리,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나라와 하늘 성전을 고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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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요한복음과 제2성전기 문헌을 다룬 자료를 읽는다. 자료들을 읽을수록 내 머릿속에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열심의 근원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단순히 오늘날보다 고대 사회가 종교와 더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고대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종교 혼합주의와 실질적인 배교자들이 가득했다.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를 꾸짖었던 이유, 다니엘서 저술 목적을 생각해 보자.

또한, 고대 유대인들은 현대인과 다른 사고방식을 가졌음을 확신하게 된다. 제2성전기 문헌만 봐도 고대 유대인들은 역사적 사실이라는 개념에 철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상상력을 공유하는 데 거부감이 없었다. 그들이 사실 그 자체보다 중요하게 간주한 건, 실제 역사적 사건이 갖는 의미와 그것을 바탕으로 한 메시지에 있다.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해 유대교와 기독교를 비역사적 종교로 인식하는 부류가 발생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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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공동체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국가법이 유일무이한 효력을 갖는 경우가 많지만, 고대 사회에서는 종교법 또한 지대한 효력을 가졌다. 

고대 이스라엘은 사사 통치 시대에서 왕권 국가로 전환된 이후에도 (형식상으로라도) 율법이 최상위 권위를 가졌다. 신명기 사관으로 집약되는 유대인 사고는 이스라엘 왕국 멸망과 포로 귀환을 거치며 율법 준수에 관한 집착으로 귀결되었다. 에스라서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하스모니안 왕조 등장 이후 헬레니즘화된 개혁이 실시되면서도 율법 준수라는 기조는 유지된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이 율법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율법 준수를 강조하는 동시에 언약을 선포한 선지자들이 있다. 이스라엘 국가의 멸망과 유대 사상의 종말이라는 위기에서 이스라엘 회복과 갱신은 율법 준수가 아닌 언약으로 가능하다고 선포한다.

인간의 책임으로써 율법 준수는 매우 중요한 행동 강령이지만, 인간은 필연적으로 부패하고 그 결과 심판을 받는다. 그러나 끝이 아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새로운 시작을 가능케 한다. 

예수 생애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과 언약 사이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율법 준수를 통한 거룩한 이스라엘을 꿈꾸었고, 그러한 이유에서 규례를 어기는 자들을 정죄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대인들은 안식일 규범을 어기고 신성모독을 한 예수는 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cf. 요 5:18).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 오늘날 종교중독이라고 부르는 율법주의적 열심이나 신앙적 해이에 빠지는 이유가 바로 율법과 언약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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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푸스는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 이후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 하나님에 관해 기록한다. 왕이 이스라엘을 이끄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이 선택한 지도자를 통해 친히 개입하신다. 모세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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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s.sagepub.com/doi/pdf/10.1177/09518207900000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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