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BNTC 2020 감상평

끄적 2020. 9. 6. 01:10

내가 알기로는 박사 과정 학생은 일 년에 한 차례 이상 학회에서 발표를 해야 하다. 정확한 규정은 지도 교수와 사무처에서 알려 주겠지. 아무도 내게 학회 참석을 요구하지 않았지만, 어차피 앞으로 발표할 기회를 가질텐데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있는 지금 학회 분위기를 파악하려고 참여했다.

Zoom이란 매체를 이용하긴 했지만, 글과 영상으로 보던 학자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어서 신기했다. 앞으로 직접 얼굴 보며 대화할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다만 박사 과정 지도 문의를 위해 여러 교수와 이메일을 주고 받은 터라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교수가 좀 있는데, 내가 다른 학교로 갔다는 사실을 알면 어떻게 반응할지 조바심이 난다. 뭐 이런 사례가 종종 있으니 별 일 아니라는 듯 반응해주면 마음이 편하겠다.

예상 외로 영어는 무난했다. 주변에서 영국 영어에 관해 이런저런 말을 들은 게 있어서 신경 쓰였는데, 이번 학회를 통해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얻었다. 지난 SBL Rome International meeting 2019와 Enoch Seminar 2020에서 특정 지역 출신 참석자의 영어를 알아 듣지 못해 멍 때린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참석자의 영어가 아무런 제약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학계에서 학회의 위치와 기능이 무엇일지 생각해 봤다. 내 짐작이지만, 학회 발표는 저널에 소논문을 게재하기 전 중간 점검을 위한, 에둘러 표현하면 발표자의 발상을 글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다듬은 수준에서 대중에게 소개하는 정도가 아닌가 싶다. 발표자가 박사 과정 학생에서 교수까지 다양했는데, 완성도나 기여도에서 한계점이 보였다. 학계에서 소논문 게재와 peer-review를 높게 평가하는지 알 듯하다.

내가 직접 발표할 기회를 갖는다면 큰 어려움은 없어 보인다. 영어로 발표하고 질의응답을 해야한다는 부담감은 다른 문제이다. 아직 논문 지도가 시작되지 않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지만, 지도 교수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나면, 특히 첫 일년 평가를 잘 마치고 나면 무난한 학위 과정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내년 학회는 University of St Andrews에서 열린다고 한다. 그때는 현장에서 소식을 전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끄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도 교수의 논평과 제안  (0) 2020.11.14
유학은 처절한 현실이다  (0) 2020.10.21
BNTS 2020 금요일 강연 소감  (0) 2020.09.05
각주 없이 글쓰기  (0) 2020.08.31
신명기 사관이라는 독특한 역사관  (0) 2020.08.25
,

1. 대중 강연에서 영어를 얼마나 들을 수 있는지 시험하려고, 일부러 이어폰이 아닌 모니터 스피커로 들었다. 전체 흐름을 따라가는 정도는 무리가 없다.

 
2. 내 짧은 지식으로 인해 각 강연의 세부 내용을 따라가는데 한계를 느낀다. 학계의 흐름을 파악하는 선에서 만족한다.


3. 박사 학위 취득 학교가 실력을 판가름하는 절대 기준이 아니다. 각 자의 전제나 방법론에 따른 관점의 차이일지 모르겠으나, 가끔 의문이 드는 발표자가 있다.


4. Simultaneous short papers는 내 관심사에 최대한 가까운 발표가 몰린 섹션을 선택했다. 발표자 세 명중 두 명이 박사 과정 학생이었는데, 둘 다 완성도가 높지는 않았다. 아직 학생인데 박사와 비교가 되서 그럴지 모른다. 학교에서 박사 과정 학생에게 요구하는 세미나 진행에 학회 발표가 포함되는 모양이라, 그 조건을 충족시키려고 발표자로 나선 듯하다.


5. 오늘 강연에서 Elizabeth Shively 박사(University of St Andrews)의 리뷰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예전에 박사 지도 문의할 때도 느꼈지만 상당히 예리하다.


6. 한국 시간 새벽 4시에 강연이 하나 있는데 자야겠다.

'끄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학은 처절한 현실이다  (0) 2020.10.21
BNTC 2020 감상평  (0) 2020.09.06
각주 없이 글쓰기  (0) 2020.08.31
신명기 사관이라는 독특한 역사관  (0) 2020.08.25
선생의 덕목: 아량  (0) 2020.08.13
,

각주 없이 글쓰기

끄적 2020. 8. 31. 22:58

웨신 MDiv 시절 누가 그런 말을 하셨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아마도 교수들의 인용 표기와 표절에 관한 엄격한 규칙에 불평을 한 사람이 많아서 그랬던 거 같다.

 

"대가가 되면 각주가 없어도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대가가 아니기 때문에 누군가의 글을 봤으면, 반드시 각주로 남겨야 합니다."

 

여기서 내 머릿 속에 강조된 부분은 "대가는 각주가 없어도 글을 쓸 수 있다"이다. 그게 가능할까 싶다.

 

글쓰기 연습을 위해 각주 없이 내 생각을 정리하는 훈련을 오랫 동안 해오고 있다. 연구 주제가 명확하고, 내 연구에 관련된 선행 연구가 많지 않아서 부담이 덜 한 탓인지, 아니면 반복적으로 쓰고 말해서 그런지 남의 글을 읽지 않고도 머릿 속에서 나만의 독창적인 구상이 떠오르고 글을 쓰다보면 생각이 정리되는 신기한 경험을 자주하게 된다. 이제 박사 과정 일년 차에 진입하는 학생이 이 정도이면, 대가는 각주 없이 글을 쓸 수 있다는 말이 무엇일지 상상이 된다. 물론 나는 차후에 관련 연구를 찾아보고 보강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게 대가와 다르다.

'끄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BNTC 2020 감상평  (0) 2020.09.06
BNTS 2020 금요일 강연 소감  (0) 2020.09.05
신명기 사관이라는 독특한 역사관  (0) 2020.08.25
선생의 덕목: 아량  (0) 2020.08.13
구약 전공하세요  (0) 2020.08.13
,

구약개론이나 주석서를 몇 권 읽으면 제일 많이 볼 단어는 "신명기 사관"일 가능성이 크다.

역사라고 하면 국가의 주요 사건을 나열하되, 외부 정세의 흐름을 더하여 분석해야 마땅한데, 구약성경을 읽다 보면 그들 나름의 독특한 관점에 관심이 쏠리게 된다.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 이스라엘 역사에서 모세와 다윗이 독보적인 인물이라면 그에 걸맞게 그들의 기록을 따로 분리해 다루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의문이다. 모세와 다윗마저 하나님의 구속사 중 일부로 간주하는 느낌이다.

신명기 6장은 하나님을 경외하면 축복이고 우상 숭배는 멸절당할 저주라고 선포한다. 신명기 사관의 핵심이다.

구약성경이 신명기 사관으로 편집되었다는 증거는 차고도 넘친다. 후대 편집자로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해 나열할 때, 자신의 역사관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이스라엘 흥망성쇠의 기준이 신명기 6장이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단정 지을 수 없지만, 이러한 사관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준 인물은 모세와 다윗이라고 생각한다. 모세의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그리고 다윗의 이스라엘 왕국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랐을 때 독립적인 국가를 수립하고 국가가 번영했다. 후대 왕의 업적을 평가할 때 다윗을 그 기준으로 둔 이유는 명확하다. 반면 왕국의 분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은 우상 숭배로 인한 결과이다.

성경에서 북이스라엘 아합 왕은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자이었고, 그의 통치는 악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다른 역사 기록은 그의 통치는 대내외적으로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 사례는 구약 성경 저자나 후대 편집자들의 사관이 달랐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이유가 된다. 

더구나 바벨론 포로 이후 귀환을 경험한 세대가 신명기 사관에 매료되었을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내 경우 칼빈 시절에 언약 신학을 일부 다루었고, 앞으로 집중적으로 연구해야 할 주제 중 하나인데, 이런 상황에서 신명기 사관을 접할 때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내 관심사는 언약 신학의 기능에 일차적 관심이 있고, 더하여 신명기 사관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있다.

분명 내 연구 본문은 요한복음 10장인데 온갖 주제와 본문을 다 살펴봐야 한다. 때마침 『신명기역사서연구』라는 책이 번역되어 나왔다고 한다. 이건 꼭 읽어봐야겠다.

'끄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BNTS 2020 금요일 강연 소감  (0) 2020.09.05
각주 없이 글쓰기  (0) 2020.08.31
선생의 덕목: 아량  (0) 2020.08.13
구약 전공하세요  (0) 2020.08.13
선한 목자 되신 주님, 나는 기도의 힘을 믿습니다  (0) 2020.08.11
,

선생의 덕목: 아량

끄적 2020. 8. 13. 16:03

나에겐 당연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금기시되는 문화가 있다.

웨신 시절 내가 경험한 대부분의 교수는 자기 생각과 달라도 글로 설득할 수 있다면, 논리적 설득력이 있다면, A+를 주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하물며 조직신학과 역사신학 분과에서도 그랬다. 실제로 합신 출신의 보수 성향의 교수가 그런 말을 했었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페이퍼를 썼고, 성적은 A+를 받았다.

내가 게리 버지 박사를 좋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그로부터 요한복음 수업과 자율 연구(independent study) 지도를 받았다. 성적은 All A. 내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버지 박사의 입장은 학계의 대세를 지지하는 반면 내 견해는 극소수의 견해, 그마저도 나만의 논리로 풀었음에도, 영어 문법에 대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후한 점수를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에게는 영어 문법과 같은 실수보다는 학자가 갖추어야 할 창의력과 논리 전개 등이 더 중요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입장과 상관없이 설득력 있는 글은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그의 태도에 반했다. 또한 그는 나를 위해 강력한 추천서를 써주었다.

이런 문화가 처음부터 당연하게 여겨졌던 건 아니다. 그리고 지금도 기본값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학부 시절 정말 꼴 같지 않은 교수들을 만나 목사이자 교수라는 사람에 대한 환멸을 느꼈고, 내가 자랑스러워하는 웨신 시절에도 갑툭튀 같은 사람들을 만나 배운 것 없이 초라한 성적을 받은 적이 있으며, 칼빈에서도 자만감 가득한 교수를 만나 내상을 심하게 입은 적이 있다.

그래서 뒤늦게야 웨신 시절 나를 아껴주고 지지해주던 교수님들이 얼마나 귀한지, 그리고 버지 교수와 같은 분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시도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었고, 그 결과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로서는 그런 분위기에서 내 최선을 다했고 내 역량을 끌어올리는 기회가 되었다. 내가 지금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분들의 기대와 지지가 큰 힘으로 작용했다고 믿는다.

그런데 칼빈 시절에 만난 대부분의 한인 유학생들은 교단 신학과 분위기, 교수 성향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 몸을 사린다. 친해지니 하는 말이지만, 주위에서 나에게 무슨 질문이 나오면, 나를 도와준다고 "목사님 그건 사상 검증이에요"라고 웃으면서 말해주곤 했다. 씁쓸하지만, 고의는 아닐 테지만, 습관적으로 이런 태도에 젖어 있는 분들이 있다. 나야 교단에 몸 사릴 이유가 없는 목사라 내 하고 싶은 말하지만, 그리고 스스로 칼빈주의를 택했기 때문에 떳떳하지만, 내가 볼 때 정말 사소해 보이는 것들에 신경 쓰는 그들이 안타깝게 보였다. 하물며 박사 과정 진학에 특정 학교를 지원하느냐 마냐를 두고 선례가 없다는 둥 정말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대답이 돌아왔다. 나중에야 그들로부터 "생각해보면 학교에 따라 불이익을 받은 적은 없는 거 같아요"라는 답을 듣긴 했지만.

오해는 하지 말았으면 한다. 나는 칼빈 시절에 만난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들은 내 성격을 잘 알고, 나 역시 그들을 잘 안다. 그래서 이런 글도 망설임 없이 쓴다. 그들에게 상처 주려는 의도가 없다는 걸 그들이 알 거라고 믿기에.

다만 그 정도로 몸 사리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세상은 넓고 익히고 배워야 할 지식은 많다. 유학을 나온 마당에 지적 견문을 좀 넓혀야 하지 않겠나. 무엇보다 우리 같은 한인 유학생은 대체로 보수적이라 진보적이라고 해봐야 여전히 보수 진영에서 머물 확률이 매우 높다.

이제 글을 마무리 지어야겠다. 나로서는 공식적인 학업은 박사 과정이 마지막이다. 박사 학위를 하나 더 해야겠다거나 갑자기 타 분과에 도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는 한 말이다.

앞으로 지도 교수의 검증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기에 조심스럽지만, 나는 예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다. 현 지도 교수로 내정된 데이빗 모빗(David Moffitt) 박사의 이메일을 받을 때마다 그의 따스함과 친절함을 느낀다. 나보다 앞서 그의 지도를 받은 A 박사는 나에게 지도 교수로서 최고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현실적으로 걱정이 앞서지만 기대되는 마음도 크다. 무엇보다 매력적이지만 그만큼 모험을 해야 하는 연구를 선뜻 수용해준 그의 지지에 감사한 마음이다.

정말 한 마디만 하고 마무리하겠다. 

좀 더 과감히 도전해도 괜찮아.

참고로 칼빈 시절 합동과 고신이 비슷한 비율이었다. 각 교단 규모를 고려하면 고신 출신이 많은 거다. 최근 이례적으로 통합 출신 목사님들도 있었다. 웨신 시절 교수진은 대부분 합동 출신이었다. 합신과 고신도 좀 있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이 학교에 관해 잘 모르겠지만, 웨신은 개방적이라 해도 근본적으로 보수 성향이다.

,

구약 전공하세요

끄적 2020. 8. 13. 15:59

좋은 교수님들을 만나 재밌게 공부하다보니 지금은 생각에도 없던 요한복음을 붙잡고 있게 되었지만, 신대원 입학 전에 전공하고 싶던 분야는 구약이다.

 
주제가 "요한복음 10장 선한 목자 담론의 기원"이고, 방법론을 전승비평, 신약의 구약 사용 등을 사용해서 요한복음보다 구약을 더 많이 들여다 보고 있다. 몇몇 구절과 장에 한정되지만, 현재 연구 범위에 포함된 본문만 창세기, 역대하, 시편,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미가, 스가랴 등이 있다.


내가 교수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 이유이자, 내 연구 속도가 더딘 이유가 바로 이 본문들을 연구 목적에 맞게 처음부터 다시 해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희한하리만큼 내 관심사에 관한 연구는 매우 미흡한 편이다. 그나마 관련 연구들은 큰 도움이 되지 않으며, 자극을 주고 새로운 생각을 열어주는 글은 극소수이다.


나는 신약학자의 길을 걷게 될 가능성이 매우 크지만, 내게 본인의 진로 상담을 요청하는 분들에게는 구약을 공부하라고 말한다. 그곳이 노다지(=황금어장)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특히, 소선지서를 연구하면 앞으로 전망이 좋다고 말해 준다.


그럴 기회가 주어질지 모르겠으나, 기회가 되면 내가 쓰고 싶은 구약 주석이 있다. 그것은 스가랴서이다.

 

 

2020.08.12 수 오후 4시 20분 경

,

하나님은 언제나 앞서 내가 가야 할 길을 비춰주신다. 매번 내 예상을 뛰어넘지만, 매번 그 말씀대로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앞에 내 예측과 계획은 한낱 부스러기와 같다고 여겨질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매번 내가 예상치 못한 말씀을 듣게 하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징조를 보여주신다.

주변에 말을 못했지만, 현 코로나 19 상황으로 인해 박사 과정 입학을 두고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내 고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듯, 며칠 전 내게 하신 말씀대로 상황이 전개될거라는 징조가 보이고 있다. 어쩌면 내게는 더 좋은 선택지가 될거 같다.

내가 뭘 좀 안다고 폼 잡고 싶어도, 기도하는 분들 앞에서 겸손해질 수 밖에 없고, 하나님 앞에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다.

혹시나 불필요한 걱정을 하실 분이 있을까 싶어서 말씀 드린다. 내가 세인트앤드루스대학교(University of St. Andrews) 박사 과정 학생이 된다는 점은 변함이 없으니 걱정은 안 하셔도 된다.

'끄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생의 덕목: 아량  (0) 2020.08.13
구약 전공하세요  (0) 2020.08.13
유학이 곧 기득권은 아니다  (0) 2020.07.27
나의 가벼운 독일어 학습지 결제  (0) 2020.07.22
내가 서평을 쓰지 않는 이유  (0) 2020.07.20
,

요새 언론이 공들이는 작업 중 하나가 시민에게 민주당을 비롯한 노동권, 사회단체 등을 기득권으로 각인시키는 것이다. '기득권'이란 낙인을 찍으면 타도해야 할 세력이 되어버리니까 말이다.


내게 유학에 관해 물어보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웬만하면 유학을 가지 말라고 말해 준다. 곡해해서 들으면 '사다리 걷어차느냐?'라고 물을 수 있겠지만, 이 바닥은 올라가 봐야 그 밥에 그 나물일 가능성이 커서 사다리를 걷어찬들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위해 같이 할 동역자는 많을수록 좋다. 그런데도 유학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성공보다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고, 보상보다 치뤄야 할 대가가 더 크기 때문이다.


지금은 잠시 여유롭게 지내고 있지만, 미국에서 나 자신을 몰아쳤던 이유는 부모님의 후원 때문이다. 내 돈으로 공부한다면 재정적으로 어려워도 정신적 부담을 느끼지 않았을 거다. 그러나 자식을 위해, 더 나아가 자식 이전에 주의 종으로 키우겠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노후를 포기해야 하는 부모를 생각하면 이 악물고 공부할 수밖에 없다. 나 자신을 돌보지 못한 후유증은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급격하게 불어난 몸무게이다.


우리 부모님은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해하신다. 때로는 재정적 어려움을 내비치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꼭 박사 학위를 받아야 좋은 목사가 되는 게 아니라고 말씀도 하시지만, 최대한 지원해주시겠고 말씀해주신다.


내가 왜 이야기를 할까. 유학간다고 해서 모두가 기득권은 아니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서다. 노경목처럼 온갖 이론으로 객관적인 입장을 취하는 듯하지만, 결국은 유학 보내면 기득권으로 보는 편협한 시각(혹은 의도적으로 그런 여론을 조장하는 세력)이 존재하는 반면 없는 살림에 밑바닥까지 긁어서 자식을 유학 보내는 집도 있다. 세상적으로는 그래야 집안을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절박함 때문이고, 신앙인으로서는 내 자식새끼 부귀영화 누리게 해주겠다는 게 아니라, 자식을 통한 대리만족이나 명예를 누리겠다는 게 아니라, 주의 종 하나 키우는 게 자신의 사명이라고 믿는 그 믿음으로 사시는 분들도 있다. 우리 부모님처럼.


좌파 경제학자가 분석한 지도층 자제 해외 유학[노경목의 미래노트]
www.hankyung.com/politics/article/202007171792i

 

,

올해 목표 중 하나는 독일어이었는데, 코로나-19로 인해 학원에 다닐 수 없었다. 독학을 시도했으나 며칠 유튜브 동영상 보고 접었다. 외부 압력 없이 혼자 목표로 설정한데다가 독학하려니 의욕이 끓어오르지 않는다. 이번에 독일어 학습지가 나왔다기에 바로 결제했다. 이건 강제효과가 있겠지.

,

내가 서평을 쓰는 이유는 딱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과제라서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경우이고, 두 번째는 내 필요 때문이다.

칼빈신학교에서는 첫 학기 연구방법론 수업을 제외하고는 서평을 쓰라는 과제가 없었다. 학기 말에 제출할 페이퍼에 필요한 책 한 권을 꼽아서 A4 1장 반 분량으로 정리하는 과제라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 이후로는 서평을 요구받은 적이 없다. 에외적이라고 해야 하나, 작년에 박사 과정 지원을 위해 지도 교수를 찾는 과정에서 교수의 질의에 답하려고 책 한 권을 다 읽고 내 생각을 보낸 적은 있다. 당시 그 교수는 참고하라고만 했지 반영하라는 말은 없었다. 오히려 내가 꼼꼼히 읽고 내 생각을 알려주었더니 굉장히 좋아하셨다. 앞으로 지도 교수가 독서 과제를 내줄 텐데, 사실 지금 작업하는 책도 그 일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교수의 평가에 부합하기 위해 의무적으로 응하기는 해도 자발적으로 할 생각은 별로 없다. 아, 한 가지 명분이 있긴 하다. 박사 과정 학생은 저널에 서평을 기고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박사 과정 학생에게 저널 기고가 필수 덕목인지는 모르겠지만, 연구 활동 중 서평을 저널에 실어보는 경험은 이때 아니면 언제 해보겠냐는 생각은 든다.

지금 독서후기라는 명칭으로 완독한 책 중 기억해 둘만 한 책을 짧게 기록해두고 있다. 나를 위한 기록이라지만, 남이 읽을 수 있는 완성형 문장으로 쓰는데 소요되는 시간과 팟캐스트 전용으로 녹음하고 업로드하는 시간을 합치면 허비되는 시간이 만만치 않다. 내 연구와 차후 강의를 위한 자료 축적이라는 명분이 아니면 귀차니즘에 빠질 가능성이 없지 않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서평은 연구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다. 책 한 권을 다 읽고 그 책을 이해하고 글로 정리하는 노력이면, 차라리 소논문을 쓰는데 집중하는 게 훨씬 생산적이다. 연구사나 현재 학계 현황, 관련 연구의 문제점을 제기하기 위해서라도 책 내용 전체를 이해하고 있어야 하지만, 서평 수준까지는 다룰 필요가 없다.

내 생각에 서평을 쓰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평가자 입장에서 학습자의 이해력을 평가하는 수단이다. 평가자 입장에서 학생이 책을 얼마나 잘 소화했는지 평가하는데 서평만한 게 없다. 책을 대충 훑어보고 쓴 서평과 정말 고민해서 쓴 서평은 다르다. 두 번째는, 저자와 학문적 교류를 위해서다. 사실 학계에서는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학자들은 서평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다. 내 주변 교수님들은 영미권 저명한 저널에 자신의 책을 서평한 글이 올라오는지 확인하고, 신규 서평이 올라오면 꼼꼼히 읽고 만족스러우면 은근히 자랑했다. 연구자 입장에서 서평을 통해 수용할 만한 비판은 받아들이고 자신의 연구를 발전시키는 게 바람직한 선순환으로 보인다.

사실 서평은 전문영역이다. 신학처럼 세분화된 전문 분야일수록 더욱더 그렇다. 저자의 논지를 평가하려면 그의 주장과 근거를 이해하고, 장단점과 차후 보완사항 등을 지적해야 하는데, 내가 볼 때 서평이라는 목적에 걸맞은 수준의 서평을 쓰는 경우를 본 적이 별로 없다. 내가 감히 평가하기에 조심스럽지만, 서평자가 그 책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의심스러운 경우가 허다한데 그의 평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책 내용을 단순 반복하는 수준에 약간의 양념을 덧붙이는 정도라면 출판사 소개 글과 내부를 들여다보는 게 더 실용적이다.

현 수준에서 서평은 내 연구에 도움이 안 되고, 서평을 쓸 만큼 역량이 안된다. 이런 이유로 서평은 그다지 유익한 활동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서평 아닌 서평을 쓰다가 골치 아파서 이 글을 쓰는 건 또 뭐니... 여러 저자가 쓴 글을 모아서 편집한 책이라 더 심란하다.

'끄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학이 곧 기득권은 아니다  (0) 2020.07.27
나의 가벼운 독일어 학습지 결제  (0) 2020.07.22
요한복음의 인자 기독록과 아버지-아들 기독론  (0) 2020.07.13
극상근 파열  (0) 2020.02.09
2019년을 마치며  (0) 2020.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