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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예배했는가?』 (제임스 던, 박규태 역, 좋은씨앗)


유일신앙을 고수해온 유대 기독교인에게 '예수를 예배할 수 있는가?'란 질문은 자신들의 신학적 틀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에 대한 분명한 입장정리가 되지 않는다면, 유대 기독교인들은 다신교에 익숙한 이방 기독교인들 사이에 신학적 논쟁이 벌어졌을 수도 있다. 다행히도 초대교회 내에서는 이와 관련된 내부갈등은 없었던 걸로 보인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에 대한 믿음이 신앙의 일치를 이루는 기반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문제는 성육신으로 구속사를 성취하신 예수를 예배할 것인가, 구속사를 계획하시고 주도하신 하나님을 예배할 것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에 대한 입장이 명확해야 했다.


던은 성서학자로서 용례연구와 본문연구를 통해 이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그의 논증은 대체로 객관적이다. 자신의 대화상대로 삼은 래리 허타도와 리처드 보컴의 논증에 대한 반박은 유의하여 볼만 하다. 아쉬운 점은, 허타도가 지적했듯이 요한계시록에서 어린 양을 예배하는 서술에 대한 독특함을 지적하면서도 간략하게 다루었다.


던은 탁월한 성서학자이지만, 예수 섬김이란 주제에서는 허타도의 『주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서인지, 그의 책은 개론 수준에 그치는 듯 싶다.


자세한 서평은 링크된 뉴스앤조이 상동석 기자의 글을 읽어보면 좋겠다. 허타도의 서평도 링크를 남겨본다.


(+) 뉴스앤조이 강동석 기자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03149


(+) 래리 허타도

https://larryhurtado.files.wordpress.com/2010/07/dunn-was-jesus-worshipped-review.pdf


첫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예배했는가?
국내도서
저자 : 제임스 던(James D. G. Dunn) / 박규태 역
출판 : 좋은씨앗 2016.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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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변화의 원동력

성찰 2016. 6. 23. 15:50

<고통, 변화의 원동력>
철학자 김상봉은 슬픔이 사회를 전복시켜왔다고 했다. 유대교신앙과 기독교신앙에서 고통의 문제는 기복주의적 신앙관을 전복시키고 신앙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게 힘이다. 아픔은 당사자와 주변 사람들의 마음과 육신을 피폐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인내로 기꺼이 감당해야만 하는 시험일지도 모르겠다.

 

관련기사>>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4193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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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시대적 흐름은 기독교윤리학과 영성신학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는 방향으로 흐르는 듯싶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할 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인들 보다 못한 윤리의식으로 지탄을 받는 현실은 기독교윤리학의 필요성을 요구하고 있다. 지금은 다른 분야에 비해 주목을 덜 받고 있지만, 윤리의식의 부재가 심각한 현실은 기독교윤리학의 확산을 필요로 하고 있다. 또한 한국교회가 세계에 유래 없는 새벽기도와 기도원 문화가 잘 자리잡고 있지만, 기복주의와 은사주의에 매몰된 현실에 대한 반성으로 참된 영성훈련의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은사나 지식을 영성으로 치부하는 얄팍한 수준에서 벗어나 전인적인 영성훈련을 추구하게 되리라 여겨진다. 물론 학문적 진보 보다 더 중요한 건 결국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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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의 기원

추천도서 2016. 6. 6. 19:42

『유대교의 기원』(조셉 블렌킨소프, 소형근 역, 대한기독교서회)


포로기신학이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의 포로로 끌려가 이방 땅에 살아가면서 형성된 신학을 의미한다. 그 기간은 바빌론 포로 당시부터 옛 이스라엘 영토로의 귀환까지로 볼 수 있다. 시대구분에서 쟁점이 될만한 사항은 귀환 이후 언제까지 포로기신학으로 봐야할 것인가에 대한 답변이 되겠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바로 포로의 귀환과 그 이후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이 두 본문에 기록된 성전재건과 공동체를 회복해가는 과정을 통해서 포로 당시에 형성된 신학이 무엇인지 살펴볼 수 있다. 당연히 주요인물인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어떤 신학을 갖고 있었는지 유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더 나아가,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유대교의 기원에 어떤 역할을 했을지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 있다. 그가 제시하는 제안은 네 가지이다.


첫번째, 유대교의 기원은 헬레니즘이 아니라 바빌론 제국을 중심으로 살펴봐야 한다. 두번째,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바빌론 유수에 대해 생생한 증언을 담고 있다. 세번째,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성전재건을 통해 야웨신앙을 중심으로 한 종교국가를 세우고자 했다. 네번째, 느헤미야는 하스모니안 왕조의 체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제안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앞으로 연구를 통해 내 자신의 견해를 정립해야겠지만, 저자의 견해대로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유대교의 기원을 탐색할 수 있는 본문이며, 어쩌면 포로기신학은 유대교의 뿌리일지 모른다.


유대교의 기원
국내도서
저자 : 조셉 블렌킨소프(J. Blenkinsopp) / 소형근역
출판 : 대한기독교서회 201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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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기 신학과 성전


포로기 신학와 관련된 구약본문 중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성전재건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리고 신명기 사관과 차이를 보이는 신학적 견해가 드러난다.


이스라엘의 멸망과 바벨론 유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학적 혁명을 가능한 토대이다. 그리고 포로 귀환 이후 성전재건은 그 변화를 현실로 적용하는 과정이었다.


이스라엘의 멸망, 더 정확히는 성전파괴에 대한 이스라엘인의 충격은 그들의 신앙에 회의를 가져오는 사건이었으며, 바벨론 유수는 그에 이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수많은 이스라엘인들은 야웨 신앙에 대한 괴리감을 보였으리라 짐작이 되고, 소수는 비극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였다. 현실의 고난 가운데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며 신학적 진보를 이룬 자들이 바로 포로기 신학의 주요인물들이다. 그리고 성전재건은 신앙회복과 새로운 신학의 정립을 상징하는 표시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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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과 언약으로 읽는 그리스도의 구원』 (우병훈, SFC)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불현듯 '나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구원을 얻는 자들에 속하는가?'라는 의문이 드는 때가 있다. 죄책감을 느꼈거나 자신의 믿음 없음을 발견했을 때 그렇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구원 받을 자들을 예비하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그렇게 교회에서 가르침을 받으므로, 누구나 한번쯤은 고민해보게 되는 질문이다.

이러한 탐구는 자연스럽게 예정론으로 이어지고, 그에 대한 답변은 늘상 자신이 소속한 교회의 교단에 따라 이중예정이나 예지예정 둘 중 하나로 결론짓게 된다. (이러한 흐름은 어느 정도의 신학적 훈련이 되어 있을 때나 가능한 거고, 대개의 경우는  낙심하지 말고 더욱더 굳세게 신앙생활하라고 권면을 받는게 현실이지만 말이다.)

이 책에서는 예정론에 앞서 1장에서 구원론과 기독론에 대해서 다루면서, 십자가에 매달리심으로 구원사역을 감당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도모한다. 2장에서는 예정과 언약의 관계를 살피면서, 오랫동안 오해되어 왔던 구원에서의 언약의 위치를 바로 잡아준다. 최근 들어 언약신학의 비중이 커지면서 예정론과 상반되는 이론인듯 오해되어 온 부분을 지적하고 둘 사이의 관계를 바로잡아 준다. 3장에서는 언약신학을 중심으로 예정을 이해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특히, 칼빈과 바빙크의 저술을 중심으로 예정과 언약의 상호관계를 간결하게 다루고 있다.

지금껏 예정론과 언약신학에 대한 개별적인 연구는 저마다 심도깊게 다뤄져 왔는데, 본서에서 이 두 신학을 연결하여 구원론을 다룬점은 실로 기여하는 바가 크다. 구원론, 예정론, 언약신학에 관심있다면, 일독을 권한다.


예정과 언약으로 읽는 그리스도의 구원
국내도서
저자 : 우병훈
출판 : SFC(학생신앙운동) 2013.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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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기독교서회의 이벤트에 당첨되어 디트리히 본회퍼 순교 70주년 기념공연으로 제작된 『전율의 잔』을 관람했다. 

본회퍼에 대해서는 히틀러 암살에 실패하여 순교한 목사로 행동하는 지성인의 표본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란 시는 모 교수님의 연구실에 붙어있어 몇 번이고 읽어본 기억은 있다.
이 연극을 보니 단편적이로나마 히틀러의 통치 아래 살았던 신앙인들의 처절함을 느낄 수 있었다. 평화로운 시대였다면, 세기적 신학자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지만, 시대적 비극을 피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며 고뇌하는 신앙인으로 정치와 사회에 대처하는 모습을 의연하게 보여주고, 삶의 현장에서 성숙한 신앙안의 삶을 보여주었다.
최근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신학교 교수들의 비윤리적인 행태들로 인해 실망감을 더해만 가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신실하게 본연의 책임을 다하시는 목사님들과 교수님들을 보여 위안을 얻고 있는데, 본회퍼을 통해서 나도 그처럼 살고 싶다는 도전을 받았다. 
아쉬운건, 본회퍼 선집을 사고 싶었으나, 프로그램 후원(5천원)으로 받은 『신도의 공동생활』로 만족하련다.



본회퍼 ‘행동하는 신앙’ 무대서 만난다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110281&code=2311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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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일링과 죄

성찰 2015. 7. 1. 03:06

어제 난생 처음 스케일링을 했다. 6월말까지 의료보험으로 저렴하게 할 수 있다는 신문기사에 혹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간 치과라 엑스레이를 찍은 후 스케일링을 받기 시작했다. 눈은 가려졌고 벌린 입안으로 금속물질이 들어가 치석을 제거하는데 살짝 겁이 났다. (치과의 경험은 다들 똑같은 걸로 알고 있으니 부끄럽지 않다.) 스케일링이 원래 아픈건지 모르겠지만, 치아와 치아 사이를 계속 쑤시고 잇몸과 계속 부딪혀서 도중에 '그만할께요'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아랫 쪽을 한 후 잠시 쉬어 가는데, 간호사 분이 좀 힘드셨는지 치석이 많다고, 양치질을 제대로 하고 있냐고 묻었다. 하루에 최소 두 번씩 꼬박꼬박하고 혀크리너로 설태제거까지 하고 있는데, 이런 질문은 좀 무례하게 느껴지지만, 오쭉 힘들면 이런 질문을 하다 싶었다. 스케일링을 마치고 의사의 진료를 통해서 충치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되었고, 결제할 때 5년만에 치과에 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또한 대체로 양치질을 제대로 안 한다는 위로(?)로 들었다.

우리는 자신이 나름 규범대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이런 생각에서 예외이지 않다. 법 없이 살 정도는 아니지만, 예의 바르게 모범적으로 살고 있다고 착각하며 산다. 하지만, 그건 나의 기준이다. 혹은 타인의 기준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나는 여전히 허물이 가득한 인간이다. 양치질을 하고 설태제거까지 해도 내 눈에만 보이지 않을 뿐 치석이 구석구석에 존재하듯이, 죄 역시 나도 모르게 나의 삶을 뒤덮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정죄하시는 분이 아니시라 우릴 정결케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르는 죄까지 제거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내어드려야 한다. 마치 내 눈이 가리워져도 의사가 제대로 진료를 해줄 것을 믿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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