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지도 교수의 평가

끄적 2021. 9. 1. 01:30

몇 시간 전에 지도 교수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본문에는 내 원고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를 쓰셨고, 첨부 파일에는 MS Word  검토 기능을 사용하셔서 논평을 남겨주셨다.

총평은 다음과 같다. 
"넌 아주 좋은 작업을 해냈다. 주요 2차 문헌을 잘 활용하였다. 다음 작업을 위한 좋은 기초 작업물을 갖고 있다."

그분이 실제로 사용한 용어는 much good work, a particularly good job, a lot of good work, a good base이다. 영미권 학자들의 평가는 냉정한 편이라고 본다면, 난 후한 평가를 받았다고 볼 수 있겠다.

영국 박사 과정에는 "Probationary Review"라고 해서 신입생이 박사 과정을 지속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는지 검증하는 절차가 있다. 이 과정을 통과하면 PhD student로 인정해주고, 실격할 경우 석사 과정 2년 차로 편입된다.

이 평가가 갖는 중요성 때문인지, 지도 교수로서 본인의 책임에 관해 설명해주셨고, 자세하게 중요한 논평들을 남겨주셨다. 수미쌍관으로 후한 평가를 해주시고, 논평은 정곡을 찌른다.

절반 이상의 시간을 다른 주제에 골몰하느라 전반적인 완성도를 끌어올리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 채 평가를 받아야 했으나, 그래도 좋은 평가를 받아서 안심하게 된다. 이제 수정 작업에 집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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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여유롭게 『솔로몬의 시편』에 관한 소논문 4편 정도 읽었다. 글에서 비난하는 왕조에 관한 견해는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하스모니안 왕조이고, 두 번째는 헤롯 왕조이다. 대세는 하스모니안 왕조를 지지하는 견해로 보인다. 둘 중 어떤 견해를 따라도 이스라엘 왕조를 박살 내는 외부 세력은 로마 폼페이 장군으로 일치하는 경향이 있다.

더 많은 글을 읽어봐야겠으나, 지금은 헤롯 왕조라는 견해에 가깝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방인"이나 "외국인"이 누구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과 관련이 있다.

하스모니안 왕조가 다윗 가문의 후손이 아니라는 이유로 왕조의 정통성을 부인할 수는 있지만, 그들은 엄연히 유대인이다. 정치 권력(=왕권)과 종교 권력(=제사장)을 통합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으나, 그들은 제사장 가문이므로 두 영역을 통합했다 하더라도 비판의 대상은 될지언정, 저주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설령 종교 영역에서 부정부패가 있더라도 "이방인"이나 "외국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는 없다. 

반면 헤롯 왕조는 이방인으로 분류할 수 있다. 헤롯 대왕은 유대인 가문이 아닌 혼혈 태생이다. 유대적 정통성을 따지자면, 헤롯 왕조야말로 이방인에 가깝다.

흥미로운 사실은 성전과 관련이 있다. 하스모니안 왕조의 업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성전 청결 사건이다. 로마 제국에 의해 부정해진 예루살렘 성전을 정결하게 하고 수전절을 지키도록 한다. 헤롯 대왕은 통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헤롯 성전을 증축하도록 했다.

성전 회복과 메시아사상의 연관성을 고려한다면, 마땅히 헤롯 왕조보다는 하스모니안 왕조에 더 정통성을 부여해야 한다. 유대인 정체성을 고려하면 더욱더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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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저자를 왜 솔로몬으로 설정했는지 의문이다. 솔로몬의 시편 17과 구약 시편 72가 유사하다고 하는데, 내가 볼 때는 다윗 왕조의 영광을 노래한다는 공통점 이외에 무슨 유사점이 있는지 모르겠다.

앞으로 나타날 다윗 가문의 후손을 노래해서 솔로몬의 이름을 붙였다고 해도, 통일 왕국을 분열시킨 장본인 솔로몬의 이름을 붙였다는 건 모순이다.

17:6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왕국을 자기네 영광을 위해 호화롭게 세웠습니다. 오만으로 다윗의 왕좌를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송혜경 역)

솔로몬을 비판하는 노래라면 이해가 된다. 하지만 솔로몬을 저자로 해서 다윗 계열의 메시아를 고대한다? 이해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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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ph L. Trafton은 메시아 사상에 관한 구절에서 다윗과 관련된 구절과 연관성 없는 구절로 나뉜다고 지적한다. 그가 근거로 제시했듯이, 다윗 계열의 메시아 사상이 압도적으로 많이 나타난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1)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그 다음에는 (2) '하나님이 과연 다윗 계열의 메시아 사상을 말씀하셨는가?'


다윗 계열의 메시아 사상은 유대 메시아 사상 가운데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이념 중 하나이지 절대 진리로 간주되지 않았다는 게 내 가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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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New English Translation of the Septuagint / Albert Pietersma and Benjamin G. Wright eds. / Oxford University Press

pdf 버전을 제공한다. 인쇄 불가.
http://ccat.sas.upenn.edu/nets/e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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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번역

논문작성법 2021. 8. 9. 16:44

번역 작업을 시작했다. 번역기는 구글 번역을 주로 사용하고, 그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 카카오 번역과 파파고를 참고한다. 얼마 전 번역기 모음 사이트를 알게 되어 사용 중이다. 몇 문장을 돌려보니 결과물은 여전히 구글 번역 > 카카오 번역 > 파파고 순으로 평가되지 않을까 싶다.


발표나 토론 등 다양한 평가 방식을 병행하지만, 글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칼빈 시절에는 수업일 경우 70%, independent study는 100% 글로 점수를 준다.


영미권 학교에 재학 중이니 당연히 영어로 글을 써야 한다. 내가 지금까지 열심히 작업한 한글 초안은 완성도 높은 글을 쓰기 위한 기초 작업일 뿐 교수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영문 번역 작업이 아주 중요하다. 내 글을 읽고 평가하는 교수들은 학계 전문가들이다보니, 단어 하나, 문장 구성 등 무엇 하나 허투로 작성할 수 없다. 초벌 번역을 신속하게 마치고, 꼼꼼한 교정 작업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번역기로 다양한 결과물을 확인해서, 자신이 볼 때 최선이라고 여겨지는 결과물을 토대로 수정을 더하면 된다. 영어사전은 어휘력을 늘리는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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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고르기

끄적 2021. 8. 3. 02:56

박사 과정에 재학하면서도 여전히 한글로 먼저 글을 쓴다. 간결하게 글을 쓰고, 논리 전개의 흐름을 살리려면 모국어로 글을 완성하는 게 도움이 많이 된다.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번거롭지만, 글의 완성도와 작업 효율성을 고려하면 어쩔 수 없다.

서론 부분을 보면 알겠지만, 아직 완성된 글이 아니다. 서론은 대개 맨 마지막에 써야 자연스러운 도입을 이끌 수 있다. 후반부에 다뤄야 할 글도 몇 개 남아 있다.

미완성이지만 총 38쪽을 채웠다. 글자 수는 본문 기준 10,000자가 넘는다. 영어로 번역하면 글자 수가 달라지지만, 그걸 감안해도 아직 써야 할 분량이 남아서 12,000자가 넘지 않도록 유념해야 할 판이다.

사실상 결정타를 날리는 일만 남았다. 선행 연구의 한계를 지적하고, 본문 해석을 통해 내 주장을 위한 근거를 마련했다. 이제 몇 문장의 글로 내 주장이 무엇인지 보여주면 된다.

조심스럽다. 간결하지만 묵직한 설득력을 담을 수 있느냐가 단 몇 줄의 글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 결정타를 날리고 나면, 나머지는 별 어려움 없이 완성할 수 있다.

틀을 구상할 틈도 없이 반박할 논리에 더 신경을 쓰다 보니 조밀도가 떨어지고 중복된 진술이 군데군데 보인다.

마지막 한 방을 날리기 전, 글의 구성을 다듬으려고 한다. 이 작업을 통해 일관성은 높아지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겠지. 이후엔 바로 결정타를 날리고, 글을 마무리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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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는 아니지만 세 영역을 다 경험해 보았다. 현재 박사 과정 학생이므로, 신약학에서 만큼은 준전문가(semi-professional) 단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1. 서평

학부 시절에는 서평을 많이 남겼다. 서평이라고 해봐야 독서후기 정도겠지만, 요약 보다는 책이 가진 의미와 가치, 내가 느낀 점 등을 주로 남겼다. 웨신 신대원 시절까지는 과제로 서평을 가끔 썼고, 칼빈 시절에는 1~2편 정도 쓴 듯하다. 한국 석사 학위를 인정 받아 3학점을 면제 받아 칼빈 졸업 요구 학점이 18학점이었는데, 9학점은 수업으로 9학점은 independent study와 major research paper로 끝냈다. 지금은 서평 과제가 전혀 없다.

학술지에 서평을 기고할 수 있는 자격은 최소 박사 과정 학생 이상이다. 좀 까다롭다 싶지만, 실제 독자 대상층이 주로 현역 교수들이란 사실을 감안하면, 납득이 된다.

현재 책에 관한 짦막한 글을 남기는데, 대부분 내 자신을 위한 글이다. 특정 책에 관한 기억의 실마리를 남기려는 의도가 강하다. 간혹 혹평으로 인식하는 분들이 있는데, 철저히 내 주관적인 관점과 필요에 의해 남기는 글이라 그들의 불편함은 내가 고려해야 할 요소가 아니다.

2. 번역

번역은 학부 시절부터 시작했고, 웨신 신대원 시절에는 수업 발표를 위해 책 chapter 별 번역을 주로 했다. 이때 경험을 통해 번역에 대한 환상이 깨졌고, 지금까지 번역을 지양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가끔씩 국내에 소개되어야 할 책들이 보이지만, 현재 내가 진행하는 연구에서 다루면서 내 독자적인 견해를 개진할 예정이라 딱히 번역을 위한 수고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3. 집필

집필이라고 하기에는 거창하지만, 과제용 페이퍼든 졸업 논문이든 쓰는 행위 자체는 집필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대부분의 시간은 연구 주제와 관련된 글을 쓰면서 보내고 있다. 독서 행위가 중요한 기반이지만, 글로 풀어내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다. 박사 학위 논문을 최종 제출하기 전까지는 이 단계에 주력하지 않을까 싶다.

박사 과정 취득 후에도 내 성향상 개인 연구에 치중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필요에 의해 서평을 쓰고, 번역도 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굳이 하고 싶은 작업은 아니다.

개인적인 상황마다 다를 수 있는데, 최소한 학교에서 상위 과정으로 올라갈 수록 집필에 할애하는 시간이 많아질 수 밖에 없다. 교육 방식이 달라도 박사 학위 논문을 통과해야 학위 수여가 가능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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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cil, Jack W., "The Symbolism of the Shepherd in Biblical, Intertestamental, and New Testament Material" Ph.D. diss., Dropsie University, 1975.

https://repository.upenn.edu/dropsietheses/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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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적 존재라는 견해를 지지하는 입장에 관해서는 채영삼의 주장을 살펴보겠다. 그가 제시하는 근거는 세 가지이다(Chae, Jesus as the Eschatological Davidic Shepherd, 104). 첫 번째, 목자는 이방 세력을 가리키는 맹수가 아니며, 계층 구조에서 열방을 넘어서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두 번째, 90:3는 평행 구조이다. 세 번째, “양의 주인”(the Lord of the sheep)은 70 목자의 활동을 보고할 ‘또다른 목자 그룹’(another group of the shepherds, 89:61)을 부르신다. 내가 볼 때 이 주장은 얼마든지 반박이 가능하다. 첫 번째, 목자의 위치가 남다르다고 해서 그들을 천상적 존재로 규정할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 두 번째, 90:3이 평행 구조라면 이방 세력과 70 목자는 동일하게 지상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 더구나 70 목자의 통치가 역사적 사건이라고 인정한다면, 그들의 정체가 천상적 존재가 될 수 없다. 세 번째, 70 목자와 관찰자는 서로 다른 영역에 존재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덧붙여, 본문은 그 관찰자를 목자라고 지칭하지 않는다. 그들은 “또다른 자”(another one)로 불리며 그에 대한 부연 설명은 곁들여져 있지 않다. 앞으로 다루겠지만, 나는 70 목자는 지상적 존재이고 관찰자는 천상적 존재로 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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