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추천도서] 손에 잡히는 신약 개론 / D.A. 카슨, 더그러스 무 / IVP

*2005년에 나온 『An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개정판을 요약했다고 한다. 국내 번역본과 판본이 동일하니, 더 자세한 내용을 원한다면 『신약개론』(은성)을 보면 되겠다.

 

단기속성 교재로 적합한 책이다. 신학교에서 개론 수업을 들으면서 교재를 다 다룬적이 없다. 최대 16주 동안 개론서를 자세하게 다룬다는 목표 자체가 어불성설일지 모르겠다. 차라리 요약판을 교재로 채택해서 전체를 다루고, 보강하는 방식이 현실적인 방안으로 보인다.

 

구성이 알차다. 개론서 요약판이지만, 주요 핵심을 잘 담고 있다. 특히, '***는 믿음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어떻게 기여하는가?' 부분은 교회 현장에서 교육적 유익을 줄 수 있다고 보인다.

 

신학 노선은 보수적이다. 앞날개에 D.A. 카슨을 "존경받는 개혁주의 성경신학자"라고 소개한다. 추천 자료에 나열된 자료들을 보면, 그 성향이 보인다.

 

영미권 교재로 출판된 책이다 보니 추천 자료가 한국 상황과 동떨어져 있다. 번역 출판된 책 정보가 덧붙여져 있지만, 태반이 미번역된 책들이다. 국내 출판사에서 이 점을 보완하고자 서론 말미에 한글판 독자를 위해 별도로 추천 자료를 소개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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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박사 과정을 시작한지 딱 1년이 되는 날이다. 2019년 11월 19일에 합격 통지서를 받고, 2020년 10월 27일부터 과정을 시작했다.

학기 초에는 행정 업무 처리하고, 각종 행사에 참여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지도 교수와 공식적인 첫 화상회의도 입학 절차를 마무리 한 후에야 가능했다. 첫 몇 주 동안은 연구 범위를 좁히느라 이 책 저 책을 읽고 토론을 나누었다. 당분간 제 2 성전기 문헌을 다루기로 합의한 후에는, 에녹 1서로 페이퍼를 쓰기로 결정했다. 내가 페이퍼 제출을 연기하고, 잠시 심적 침체기를 겪다가, 몇 달 뒤에 지도 교수로부터 Probationary Review 이야기가 나왔다. 추정컨대, 입학 후 첫 두 달 안에 제출하는 페이퍼가 이 PR을 위한 초기 작업으로 볼 수 있다.

보통 PR을 일년 내에 끝내고, 박사 학위를 지속할 지 아니면 탈락시켜서 석사 과정으로 보낼지 결정한다. PR는 지도 교수의 지도로 제출한 페이퍼를, 평가 위원회 2명이 심사하여 점수를 준다. 평가 위원은 분과 내 교수진으로 채워지지 않을까 싶다. 지도 교수는 내 페이퍼에 대해 낙관적인 평가를 내리는 듯 하면서도, 평가 위원들을 고려해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지금은 비상 시국이라 행정 절차가 늦어졌는지 페이퍼 제출일이 12월 초로 결정되었다. 통상적이라면 이미 PR 결과가 나왔어야 하겠지만, 난 아직 PR을 준비하는 상황이며 학교 행정 데이터베이스에는 2년차로 기록되어 있다. 일년이 지났으니 뚜렷한 성과가 있었으면 좋겠지만, 아직 진행 중이라 뭔가 허전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박사 과정 학생 수준의 글쓰기 훈련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PR를 잘 대비할 수 있다는 것.

조만간 학자금 내라는 통지서가 올텐데 겁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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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 우민화 목회

성찰 2021. 10. 25. 22:59

1. 부교역 시절 부임 초기 담임 목사님들은 나에게 "목회자는 목회에 집중해야 하니, 공부는 ThM까지만 하라"고 말씀하셨다.

2.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 QT나 제자 훈련 같은 프로그램은 돌려도, 성경 공부에 집중할 생각이 없다. 

3. 작년 말 A 교회에 3주 연속 강의를 나갔었다. 강의를 마치고 질의응답 시간에 B 장로님이 질문하셨다. "목사님은 박사 학위 취득 후 목회는 안 하실 거죠? 그럼 우리는 이런 강의를 어디서 들어야 합니까?"

4. 오늘 '성도들의 지적인 콤플렉스'라는 말을 들었다. 교회에 헌신하는 길이 주님을 위한 일이라고 담임목사와 부교역자들, 평신도 지도자들의 말에 순종했지만, 정작 성경은 제대로 모르는 현실을 마주한 허탈감이 읽혔다.

5. 성도는 목마르다. 하나님의 말씀에 목마르고, 신실한 목회자에 목마르다.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예측할 수 없는 앞날이지만, 내가 쓰임 받을 곳이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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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림의 미학

성찰 2021. 10. 22. 01:19

각주는 내 주장과 근거의 출처를 밝혀 주는 역할을 한다. 한편으로는 저자가 읽은 글의 양과 고민의 시간들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나는 자료 분석 단계에서 각주 표기에 누락이 없도록 인용할 만한 문장들을 페이퍼에 적어두고 바로 각주 처리를 해버린다. 각주들은 글을 쓰는 단계에서 적합한 위치로 옮겨지거나 끝내 자리를 찾지 못해 삭제되기도 한다.

 

남의 글은 내 문장과 결합력이 떨어진다. 투박하더라도 내 생각을 글로 옮겨야 문장 결합력이 단단해진다. 또한 나만의 관점이 생기면, 타자의 글은 이질감이 생겨 버려 융합이 어려워진다.

 

살리지 못할 인용은 버려야 한다. 타인의 권위를 활용하기 위해 각주를 살리려다 내 글이 죽는다. 불필요한 인용은 과감히 버려야 내 글의 가치가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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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에 미친 듯이 책을 읽던 시절이 있다. 당시 목표는 1년 100권이었고, 실제로 3년 동안 340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 요령이 없어서 정독을 했고, 권수를 채우려고 얇은 책을 끼워 넣지 않고 순전히 내 관심사에 의해 책을 결정하고 읽었다.

 

인터넷 서점이 서로 최저가 경쟁을 하던 시기이고, 블로그가 주목을 받았다. 출판사와 인터넷 서점에서 서평단 모집을 열심히 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책은 주로 도서관에서 빌리고, 서평 활동으로 책을 받아서 읽었다.

 

언제부터인가 서평이라는 걸 쓰지 않는다. 학교 과제물이거나 지도 교수에게 공부했다는 증거로 삼으려고 쓰기는 한다. 이외에는 막 떠오르는 생각이나 내 관심사와 관련해서 파편적으로 흔적을 남길 뿐이다.

 

내가 서평을 쓰지 않는 이유는 이렇다. 일단 내가 서평을 쓸 만큼 책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형식적으로 쓰자면, 책의 구성과 요약, 주요 기여 사항과 한계를 지적하면 되지만, 내가 진정 저자의 글을 이해하고 선행 연구와 현 학계 상황을 이해하고 있느냐로 이어지지 않는다. 가방끈이 길어질 수록 주요 저널에서 서평자 요구 조건으로 최소 박사 과정 학생 이상으로 제한하는지 납득이 된다.

 

다음으로 지적질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지적질 자체가 두리뭉실해서 실요성이 떨어지고, 내가 개떡 같이 말해도 저자가 찰떡 같이 알아들어서 다음 저술에 반영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내 지적은 그냥 지적으로 끝난다.

 

대안으로 저자가 되기로 했다. 어차피 학위를 받으려면 논문을 완성시켜야 한다. 중간 중간 소논문을 발표도 해야 한다. 앞으로 연구자로 길이 열린다면, 주기적으로 글을 써내야 한다. 내 관심사와 내 능력에 한해서 내 글로 말하려고 한다. 박사 학위를 받고 나면 서평 쓰는 능력도 많이 나아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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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브 시절부터 각주는 많아도 상관 없다고 배워서 인용은 무조건 각주 처리를 해왔다. 간접 인용이든 직접 인용이든 표기를 누락하지 않는 방법은 글을 쓰면서 바로 각주 처리해 버리면 된다.

 

박사 과정에서 글을 쓰면서 인용을 줄이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온전히 내 생각과 글로 채우기란 힘겹다. 특히 주해에서 그렇다. 주석가마다 다른 견해를 진술하는데다가, 나만의 독특한 관점을 갖기 이전에는 누군가의 진술을 가져다 써야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주해를 벗어나면 인용이 줄어들고 내 관찰과 주장이 많아진다.

 

이 부분은 자연스럽게 해결이 되리라 기대한다. 내가 직접 본문을 관찰하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누군가의 관찰에 기댈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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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연습

성찰 2021. 10. 19. 13:05

지금 페북의 용도 중 하나가 글쓰기 연습이다. 솔직한 감정과 내 아이디어가 담겨서 때로는 조심스럽긴 하지만, 유익이 더 많다고 판단해서 열심히 끄적인다.

페북에 글을 올리려면 완성된 문장이어야 한다. 대개 한번에 쓰는 글이라 오타나 문법 오류 등이 포함되지만, 문장을 완성시키는 훈련이 된다.

완성된 문장의 힘은 크다.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수 있고, 차후 수정을 통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내 페이퍼와 관련된 글은 더욱 그렇다. 페북에 올린 글은 하나의 아이디어로, 문장 그대로 활용되지 않지만 페이퍼 내에 다 녹아든다. 완성된 문장을 쓰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엉성한 틀이라도 완성되면 다 쓸모가 있어진다.

내 글은 언제나 전체공개이다. 이 말은 페친이 아니어도 누구나 내 글을 읽을 수 있다. 이 말은 누구나 나에게 댓글을 달 수 있다는 말이며, 때로는 태클이 들어 올수도 있다. 전체공개인 만큼 허투로 글을 써서는 안 되며, 최대한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려는 긴장감을 주는 효과가 있다.

한국인들은 대체로 글쓰기 훈련이 덜 되어 있고, 남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를 주저하는 성향이 있다. 하지만 영미권 학교에서 공부를 하려면, 그 관성을 깨야 한다. 훈련 방법은 자신에게 맞는 도구를 택하면 된다. 내가 택한 건 페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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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유학은 자국 보다 뛰어난 나라로 가는 법이다. 미국인들이 유학 가는 나라는 극히 제한되어 있다. 그 중 하나가 영국이다. 영국 학교에서 제일 높은 외국인 비율은 미국인들이다. 대표적인 학교가 바로 St Andrews이다.

 

명사 "English"라는 단어는 '영어'라는 뜻을 갖으며, '잉글랜드인'이라는 의미도 동시에 갖고 있다. 미국인들 조차도 영국 영어에 열등감을 갖고 있으며, 반대로 영국 영어는 고상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이 부분은 미국인들에게 실제로 들은 내용이다.

 

영국은 자신을 '세익스피어의 나라'라고 자랑스러워한다. 현대 문명을 이끈 산업혁명 발상지이지만, 오래 전 그 패권을 미국에게 넘겨 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문학으로 대표되는 인문학만큼은 영국이 앞선다고 자부하고 있다.

 

영어와 문학에 자부심을 갖는 영국이라는 나라에 유학을 가려면, 그만큼 영어와 글쓰기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더구나 영국 학교는 연구 과정을 중요시하므로 스스로 공부하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한다.

 

영어, 글쓰기, 독자적인 학습 능력. 이 세 가지가 영국 학교에서 요구하는 능력이다.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는 이런 능력을 배양하는 문화가 아니다.

 

영국에서 석사 학위를 시작한 분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개개인의 상황과 역량이 다르겠지만, 공통적으로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유는 바로 앞서 언급한 세 가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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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5:15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16 우상을 만드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며 욕을 받아 다 함께 수욕 중에 들어갈 것이로되
17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구원을 받아 영원한 구원을 얻으리니 너희가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욕을 받지 아니하리로다
18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19 나는 감추어진 곳과 캄캄한 땅에서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야곱 자손에게 너희가 나를 혼돈 중에서 찾으라고 이르지 아니하였노라 나 여호와는 의를 말하고 정직한 것을 알리느니라
20 열방 중에서 피난한 자들아 너희는 모여 오라 함께 가까이 나아오라 나무 우상을 가지고 다니며 구원하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자들은 무지한 자들이니라
 
21 너희는 알리며 진술하고 또 함께 의논하여 보라 이 일을 옛부터 듣게 한 자가 누구냐 이전부터 그것을 알게 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22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23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내 입에서 공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하였노라
24 내게 대한 어떤 자의 말에 공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 무릇 그에게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그러나
25 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고 자랑하리라 하느니라

예레미야의 예언(대표적으로, 렘 25:9)에도 불구하고, 당대 이사야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포로민들은 불신앙으로 가득하다. 오랫 동안 견지해온 새로운 다윗을 통한 회복이 현실적 가능성은 전혀 없다. 현대 사회에서도 개신교인들이 신앙을 저버리는 이유 중 하나가 믿음에 대한 배신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 믿음에 대한 정당성은 논외로 한다. 욥이 그랬듯이 고통의 문제는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현존을 의심케 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다(사 45:15).

오히려 하나님은 이방 왕 고레스를 통해서 역사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자신의 계획은 창조주로서 합당하다고 주장하신다(9-13절). 더 나아가 우상숭배를 비난하신다(16절). 비난의 근거는 다시 창조주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18절). 또한 나무 우상과 달리 여호와는 옛부터 듣게 하시고 이전부터 그것을 알게 하신다(19-21절). 예언과 성취. 이것이 바로 여호와가 창조주이신 근거이다. 이스라엘의 멸망과 패배는 창조주 신앙을 저버려야 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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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5:9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

10 아버지에게는 무엇을 낳았소 하고 묻고 어머니에게는 무엇을 낳으려고 해산의 수고를 하였소 하고 묻는 자는 화 있을진저

11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12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13 내가 공의로 그를 일으킨지라 그의 모든 길을 곧게 하리니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할 것이며 사로잡힌 내 백성을 값이나 갚음이 없이 놓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

 

여호와는 고레스를 "내 목자"(44:28), "그의 기름부음 받은"(45:1)라고 부르며, 그를 통해 열국을 정복하겠다고 말씀하신다(45:2-3). 이러한 예언은 청중의 저항에 부딪힌다. 이스라엘인들에게 새로운 다윗이 아닌 이방 왕을 통한 회복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냉담함에 여호와는 창조주로서 자신의 위치를 강조하신다. 예레미야를 통해 널리 알려진 토기장이 비유(렘 18-19)가 여기에서 사용된다(45:9). 고대 근동에서 패전국의 신이 자신을 창조주라 선포하는 것 자체가 청중들로부터 공감을 불러 일으키지 못한다. 하지만 여호와는 창조주로서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며 다시 한번 고레스를 공의로 일으켰다고 말씀하신다(45:13). 공의로 세우진 고레스는 모든 길을 곧게 하며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며 이스라엘 포로민들을 해방시킨다(45:13).

 

성경에서 청중의 저항에 부딪혔을 때 여호와의 반응은 창조주로서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는 반응으로 일관된다. 이런 공식이 고레스를 향한 예언에서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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